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9998444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


국적 : 독일

그랑프리 참여 : 308회

월드챔피언 : 7회(1994년, 1995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그랑프리 우승 : 91회

포디엄(시상대) : 155회

폴 포지션 : 68회

기타사항 : 역대 F1 최다 챔피언, 그랑프리 최다 우승, 최다 폴 포지션에 빛나는 F1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의 기념비적인 업적은 뛰어난 재능과 노력하는 모습의 산물이었고 또한 기술의 뛰어난 발전, 어마어마한 돈 그리고 무차별한 광고들의 광고수익들을 낳기도 했다. 그의 업적은 한 드라이버가 F1에서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 월드 챔피언 5연패와 2000년에서 2006년까지 56승을 기록했고 전체 커리어를 통틀어 91번의 그랑프리 우승을 기록했다.



2000년대 초반을 지배하면서 슈마허는 이전의 다른 드라이버들이 받지 못한 수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정말 중요한 포인트 들이었다. - 일단 브리지스톤(Bridestone) 타이어 자체도 슈마허 개인을 위해 맞춤 생산된 것들이었다. 이런 요인들은 슈마허가 새로운 기록을 쓰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스포츠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기면서 하나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현역시절 최고의 드라이버였던 그는 수 많은 라이벌들을 물리치고 스스로 지금에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은 세나/프로스트(Senna/Prost)의 라이벌 구도가 끝나면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세대들이 떠오르는 시대였고 슈마허가 직면한 라이벌들은 그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통틀어 그의 상대는 미카 하키넨(Mika Hakkinen)이었고(이 핀란드인은 빠른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만큼의 컨트롤이나 꾸준함은 부족했다.), 그리고 21세기에는 페르난도 알론소(Fernando Alonso)와 키미 라이코넨(Kimi Raikkonen)이 그와 페라리를 상대할 수 있었던 드라이버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라이벌들에도 불구하고 슈마허는 어느 시대에서도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을 수 있는 드라이버였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건 그의 맹렬한 페이스와 꾸준함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인성이 섞이면서 나온 파워 때문일 것이다.



그의 완벽한 드라이빙은 모든 랩과 모든 레이스에서 항상 선두를 달리는 것이었다. 페라리와 그가 첫 더블 챔프를 달성한 베네통(Benetton)에서 그는 이 능력을 최대한 활용했고 불쌍한 그의 라이벌들은 그에게 무방비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베네통 시절의 슈마허 그는 베네통에서 두 번의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런 모습은 그의 초반 커리어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수 많은 논란들이었다.


그를 향한 논란은 그의 데뷔때부터 시작했는데, 1991년 벨기에 그랑프리에 조던(Jordan)팀 소속으로 놀라운 데뷔를 한 그는 바로 다음 레이스부터 조던팀과의 계약이 남아있는 상태임에 불구하고 베네통 팀에서 뛰게 되었다(물론 여기엔 현 F1 보스인 버니 에클스턴(Bernie Ecclestone)의 도움이 있었다.)


데뷔 후 1년 만에 그는 생애 첫 우승을 달성했고 특히 빗속에서는 정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었다.


그리고 다음해 또 한 번의 논란이 포르투갈에서 일어났다. 당시 월드 챔피언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랭 프로스트를 조금은 의심되는 방어 전략으로 막으면서 승리를 차지하게 되고 이 논란은 모든 이들에게 의심을 사게 된다. 결국 이런 의심은 승리의 관점이든 논란의 관점이든 상관없이 크게 불어나고야 말았다


아일톤 세나가 1994년 윌리엄즈(Williams)로 이적하면서 윌리엄즈의 시대가 F1에서 계속되리라 예상됐다. 윌리엄즈의 FW16은 조작이 쉽지 않았던 머신이었고 베네통은 자신들의 머신인 B194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세나의 기술은 윌리엄즈의 머신을 조종하기에는 쉽지 않았지만 초반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폴 포지션을 따내고 만다. 그러나 레이스에서 결국 슈마허에게 따라잡히며 승리를 내주고 마지막 랩에서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스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의 좌절감을 표출해냈다.


일본 아이다(Aida)에서 열린 시즌 두 번째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첫 코너에서 사고로 리타이어 하게 된다. 그리고 세나는 슈마허가 승리를 향해 질주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그는 슈마허가 1993년 이후로 사용이 금지된 전자 장비들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고 있다고 느낀 것이었다.


이는 대격변의 시작이었다. 이몰라(Imola)에서 열린 다음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고 슈마허는 베네통에서 이적하면서 생긴 문제들을 풀며 시즌을 지배하고 만다.


영국 그랑프리에서 블랙 플레그를 무시하면서 실격을 당하기 전에 슈마허는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완벽한 스타트를 보여줬었다. 공격적인 드라이빙에 대한 징계로 슈마허는 2번의 레이스에 출전금지 자격을 받았고 팀은 불법 장비를 사용했다는 논란 속에서 증거 없음으로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징계는(두 번째 징계로써 벨기에 그랑프리 우승 후 검차과정에서 밑판(스키드 블록)이 너무 닳아 있다는 것에서 실격 처리되고 말았다) 챔피언 타이틀 경쟁이 그와 윌리엄즈의 데이먼 힐과의 싸움으로 압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94년 아델레이드(Adelaide)에서의 데이먼 힐과의 충돌



 

결국엔 슈마허가 승리하고 말았지만, 당시 그는 이전 코너에서 트랙 밖으로 빠져 나가던 슈마허를 보고 추월하려던 힐에게 의도적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두 드라이버가 모두 리타이어하게 만들고 말았다.



1995년 윌리엄즈의 힐과 데이빗 쿨사드(David Coulthard)와 충돌을 일으킨 뒤, 슈마허는 다음해 페라리에 합류하게 된다. 마라넬로(Maranello, 주: 페라리의 본사가 있는 도시)에서의 그의 첫 시즌은 위대한 시즌 중 하나였다.


이적 첫해 그는 퍼포먼스가 부족한 머신으로 3번의 우승을 차지했고 그의 드라이빙 실력은 다른 이들보다는 다른 레벨의 실력이었다. 특히 폭우가 내리던 스페인에서 그는 매 랩당 5초는 빠른 랩타임을 보여주면서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997년에 베네통에서 테크니컬 디렉터였던 로스 브런(Ross Brawn)과 디자이너인 로리 바이런(Rory Byrne)이 슈마허 사단에 합류하였고 이는 F1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서막이었다. 팀 보스인 장 토트(Jean Todt)의 지휘아래, 그들은 F1 머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연구했다.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신뢰성 그리고 꾸준히 작동할 수 있는 능력 거기에 라이벌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최소 레벨까지 모든 것이 연구의 대상이었다.




슈마허와 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로스 브런




1997년 슈마허는 시즌 기록 실격처리로 인해(다행히 그의 승수는 인정되었지만) 윌리엄즈의 자크 빌르너브(Jacques Villeneuve)에게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급부상한 라이벌을 막기 위해 다시 한 번 트랙밖으로 빌르너브를 내몰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실패하고 말았고 결국 그는 이 행동으로 처벌을 받고만 것이다.


1998년에는 하키넨과의 위대한 대결에서 패배했고 1999년에는 시즌 중반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으로 좌절해야 했지만 드디어 2000년에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고 만다. 스즈카(Suzuka)에서 하키넨과의 치열한 혈투 끝에 따낸 이 타이틀은 슈마허 본인에게도 오랫동안 기다린 타이틀이었고 페라리에겐 21년만에 찾아온 왕좌였다.


이는 그의 승리의 물꼬를 틀어주는 것이었다. 슈마허와 페라리는 연속으로 4번의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고 만다. 2003년을 제외하고는 그를 상대할 큰 적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승리행진은 2005년에서야 끝나고 만다. 규정 변경은 페라리의 독주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의도는 정확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다.(브리지스톤(Bridgestone) 타이어는 경쟁사인 미쉐린(Michelin)에 비해 레이스 전체를 견딜 만큼에 내구성이 없었다)



2006년 규정이 다시 바뀌면서 페라리는 또 한번 경쟁력을 가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슈마허가 다시 한 번 타이틀 경쟁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고의로 머신을 트랙에 멈춰 세워 알론소가 폴 포지션을 가져가는데 방해하는 장면은 좋은 예였다. 결국 슈마허는 알론소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그러나 그의 첫 번째 커리어는 브라질에서의 강력한 반격을 가하면서 끝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2000년대 슈마허와 타이틀을 다퉜던 페르난도 알론소(중)와 키미 라이코넨(좌)




3년 후, 삶의 의미를 찾는 투쟁 속에서 슈마허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메르세데스(Mercedes)와 함께였다. 하지만 돌아온 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고, 그가 과거에 보여줬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안 좋은 퍼포먼스는 메르세데스가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과 계약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F1 내부에서는 슈마허가 누렸던 이점과 그의 커리어를 어떻게 여길 것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일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커리어에서 그는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모습으로도 그는 시대를 지배했던 위대한 드라이버 중 한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012년 두 번째 은퇴를 발표한 슈마허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수많은 승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겐 그가 금요일 아침 첫 랩을 돌 때 트랙에서 어떤 공세를 펼칠지(그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해) 궁금해 하기도 했다.


필자(엔드류 벤슨)에게는 사람들의 이런 반응보다 더 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무엇보다도 1996년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의 퀄리파잉에서의 모습이었다. 당시 그는 상당히 까다로운 머신이었던 페라리 F310을 가지고 오로지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는 곡예에 가까운 드라이빙으로 프론트 로우(주: 1, 2번 그리드)에 올랐다.


그때와 같은 놀라운 순간들은 그 수의 상관없이 슈마허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9874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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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


국적 : 프랑스

그랑프리 참여 : 202회

월드챔피언 : 4회(1985년, 1986년, 1989년, 1993년)

그랑프리 우승 : 51회

포디엄(시상대) : 106회

폴 포지션 : 33회

기타사항 : '서킷위의 교수'라 불리던 8~90년대 최고의 드라이버



우아한 드라이빙을 보여줬던 알랭 프로스트는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 구도의 주인공 중 한명이기도 했다.



이 조그마한 곱슬머리의 프랑스인은 4번의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고, 숙명의 라이벌만 아니었다면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가 기록한 7번의 챔피언 타이틀을 먼저 쉽게 따냈을 수도 있었던 드라이버였다. 실로 대단한 커리어지만 승률이나 스피드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그의 기록은 아일톤 세나(Ayrton Senna)에 비해 저평가 되거나 무시되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세나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그는 프로스트의 이런 이미지에 크게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아일톤 세나가 스스로도 칭송하던 드라이버는 프로스트 뿐 이었고, 세나를 극가의 스피드로 몰아넣은 것 역시 프로스트의 스피드였다. 또한 세나와 동등한 조건에서 그를 꺾었던 사람은 프로스트가 유일했다 – 그의 승률 역시 세나보다 살짝 높다




1982년 남아공 그랑프리를 우승한 프로스트




모든 이들의 생각대로 세나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이싱 드라이버라면 프로스트는 어느 시대의 인물보다도 그와 근접한 모습을 보여준 드라이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나가 풀 파워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면, 프로스트는 상당히 절제된 모습을 보여줬었다. 일단 트랙에 올라서면 그는 무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최대한 경제적으로 머신을 몰았다. 그 덕에 그의 머신은 고장이 나는 일이 거의 없었고 그의 드라이빙은 언제나 부드럽고 정교했다.


그가 일찍 브레이크를 잡으면 머신은 우아하리만큼 균형을 잡으며 에이펙스(apex 주: 자동차가 코너를 돌 때 코너의 정점 부분) 지나 마치 로켓과 같은 스피드로 그가 코너를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줬다. 마치 그 어느 누구나 별 큰 노력없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하지만 스톱워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거 그와 함께 팀을 이뤘던 존 왓슨(John Watson), 케케 로즈버그(Keke Rosberg), 장 알레시(Jean Alesi), 데이먼 힐(Damon Hill) 모두 프로스트가 머신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모습에 경탄하면서 팀을 떠나갔다. 심지어 나이젤 만셀(Nigel Mansell)도 1990년 그와 같이 페라리(Ferrari)에 있으면서 프로스트가 상당히 격한 핸들링을 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1985년 독일 그랑프리에서의 프로스트




하지만 그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세나와의 엄청난 라이벌 관계일 것이다. 프로스트가 1990년 페라리로 이적하기 전인 88년부터 89년까지 이 둘의 관계는 부침을 거듭하면서 F1 역사에 그동안 없었던 긴장감을 조성했다. 이 둘이 트랙 안팎으로 대결을 거듭할수록 둘은 편히 있은 경우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극한의 경지로 몰아넣었고 이는 그들에겐 두려움을 보는 이들에겐 즐거움을 선사해줬다. 오로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드라이버만이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프로스트와 세나 이 둘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실력의 소유자들 이었다.


1988년 두 거인이 맥라렌(McLaren)에서 충돌하기 직전에 프로스트는 이미 F1을 재패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그는 두 번의 챔피언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다시 한 번 타이틀을 가져갈 수 있었다.


1985년 페라리의 미셸 알보레토(Michele Alboreto)의 추격이 있었지만 시즌 중반이후 페라리의 추격이 실패하면서 압도적인 모습으로 타이틀을 따냈고 이는 그가 오랫동안 염원하던 승리였다.


페라리의 질 빌르너브(Gilles Villeneuve)가 사망한 1982년, 르노의 머신이 최악의 내구성을 보여주지만 안았어도 프로스트는 챔피언을 획득하는데 순항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1983년에는 시즌 종료까지 4번의 그랑프리를 앞둔 상황에서 그는 포인트 상으로 꺾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후에 있게되는 브라밤-BMW(Brabham-BMW)의 넬슨 피케(Nelson Piquet)의 맹공과 논란이 있지만 새로운 연료로 인해 타이틀 도전에 실패하고 만다.


1984년에도 프로스트는 맥라렌 이적 후 바로 챔피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시즌 전체에서 7번의 우승을 차지한 반면 팀 메이트였던 니키 라우다(Niki Lauda)는 5번의 우승만을 차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라우다가 승리한 4번의 그랑프리에서 프로스트는 선두로 달리다 머신의 문제로 뒤처지는 바람에 승리를 내준 것이었고, 라우다의 5번째 그랑프리 우승은 그가 머신의 문제로 피트 레인에서 출발하는 바람에 이뤄진 것이었다. 결국 프로스트는 라우다에게 0.5점차 뒤지면 챔피언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F1 역사상 최고의 터보엔진 머신으로 손꼽히는 맥라렌의 MP4-4




1980년 중반은 F1에 있어서 첫 번째 터보 엔진의 시대였다. 84년부터는 연료제한 규정이 시작되었고 프로스트의 드라이빙 스타일은 이 당시에 아주 잘 맞는 것이었다.


계속 말하지만 그는 레이싱이 시작되면 조용히 연료와 타이어를 아끼면서 선두를 공략하면서 레이스 중반에 이를 때 까지 선두를 공략했다. 그리고 갑자기 TV 화면에서 프로스트가 페스티스트 랩을 찍는 모습을 보여줬고 피트스탑이 이뤄지면서 그는 어느새 레이스의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프로스트는 최고의 올-라운드 드라이버로서 F1 역사에 한 획을 그었는데 아무래도 이는 1986년 시즌의 위대한 승리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즈-혼다(Williams-Honda)의 만셀과 넬슨 피케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프로스트는 완벽한 드라이빙으로 시즌 마지막 레이스를 역사에 길이 남을 경기로 만들며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그해 아델레이드(Adelaide)에서의 우승으로 챔피언을 차지하지만, 그의 기쁨은 헬멧의 시야만큼 그리 오랫동안 계속되진 않았고 커리어의 정점에서 거대한 위협이 수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나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로서 새롭게 떠오르고 시작했고 세나는 프로스트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1988년 맥라렌이 혼다 엔진을 사용하면서 팀의 수장이었던 론 데니스는(Ron Dennis)는 프로스트의 새로운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고, 프로스트는 피케가 들어오면 방해만 될 것이라 했고 결국 세나를 영입하게 된다. 세나의 영입과 관련된 당시의 이런 아이러니는 그 누구도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을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맥라렌의 내부 단결이 좋아지는 것 보다 세나에게로 힘이 기우는 것을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다.


뛰어난 재능에 경쟁심이 넘치고 레이싱 지능이 뛰어나면서 심지어 팀내 정치적으로도 약삭빨랐던 이 둘은 언제나 트러블을 일으켰다.


세나가 맥라렌에 입단하면서 프로스트를 목표로 삼았지만 그가 입단한 2년간 프로스트는 설명이 필요없는 최고의 드라이버로서 세나를 공평한 조건에서 꺾는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맥라렌의 코디네이터였던 조 하미레즈(Jo Ramirez)는 그 둘의 라이벌 구도를 이야기 했었는데 세나는 대부분의 F1 머신이 그렇듯이 조금은 완벽하지 않은 머신을 몰고 다녔는데, 간혹 프로스트가 그가 좋아하는 완벽한 세팅을 찾는 날이라도 되면 아무리 세나라도 그를 건들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스포츠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라이벌이었던 알랭 프로스트와 아일톤 세나(좌)




둘의 관계는 1988년 내내 나쁘지 않았고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세나가 선두로 치고 올라가려던 프로스트를 피트월에 밀치면서 이 둘의 관계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세나는 공평한 조건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따길 원했는데 그런 생각은 1989년 이몰라에서 깨지고 만다. 세나가 레이스 전에 첫 코너에서는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결국 시즌 중반 프로스트는 맥라렌을 떠난다고 발표했고(페라리에 챔피언 타이틀을 선사해주겠다는 말로) 세나의 머신의 신뢰성 문제와 일본에서의 충돌로 인한 세나의 석연치 않은 실격으로 인해 또 한 번의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둘의 라이벌 관계는 1990년에도 계속 됐다(긴장감은 덜했고 부정의에 분노한 세나에게 초점이 맞춰지기도 했지만). 둘은 시즌 막판까지 타이틀을 다퉜고 또 한 번 스즈카(Suzuka)에서 충돌이 일어나고야 만다.(하지만 1989년과 달리 이는 세나의 반칙이었다.) 하지만 1991년 팀의 잘못된 판단으로 레이스에서의 우승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페라리 수뇌부 인내심은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시즌이 끝나기 전에 머신을 트럭에 비유한 프로스트의 인터뷰에 딴지를 걸며 그에게 해고 통보를 한다.


그 어느 드라이버들도 생각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는 1992년을 안식년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3년 윌리엄즈로 돌아오게 된다. 38세의 나이로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빨리 달리는 것 뿐 이었고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여전히 시즌을 지배하면서 7번의 승리와 13번의 폴 포지션으로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프로스트는 2년계약을 맺은 상태였지만 1994년 세나가 윌리엄즈와 계약하면서 다시 한 번 세나와 함께 하는 것이 싫었고 결국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은퇴를 발표하고 만다.




1993년 윌리엄즈에서 4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프로스트




5년동안 그가 팀 수장으로 있던 것은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이지만(주: 프로스트는 1997년부터 프로스트 그랑프리라는 팀을 만들어 2001년까지 F1에 있었다), 프로스트는 많은 이들에게 천사같은 드라이빙과 슈마허 다음으로 가장 많이 그랑프리를 우승한 드라이버로 기억되고 있고 또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역사상 위대한 드라이버로 남아있다.


그가 남긴 이런 유산들은 지금까지도 존경받아 마땅하다.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9765439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스털링 모스(Stirling Moss)


국적 : 영국

그랑프리 참여 : 67회

월드챔피언 : 0회 (2위 4회, 3위 3회)

그랑프리 우승 : 16회

포디엄(시상대) : 24회

폴 포지션 : 16회

기타사항 :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챔피언십 드라이버

               월드챔피언을 못한 드라이버 가운데 현재까지 최다승 기록

 

 

스털링 모스는 F1 드라이버를 기록으로 평가할 때 기준이 되는 가장 좋은 드라이버다.

 

 

1958년 중순 후안 마누엘 판지오(Juan Manuel Fangio)가 은퇴한 이후에 F1에서 다른 드라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최고의 드라이버로 그를 여기기에 한치의 의심도 없었었다.

 

 

이 키 작은 대머리 영국인 드라이버는 자신의 발로 전세계의 모든 트랙을 자신의 것인마냥 달렸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정말이지 모든 사람들이 알만한 위대한 드라이버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업적으로 F1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선 인물이었다. 한때 그는 미스터 모터 레이싱(Mr. Motor Racing)’이라 불렸고, 은퇴한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누구나 다 알만한 그런 인물로 남아있다.

 

 

이런 모스는 F1 챔피언을 아주 손쉽게 따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일단 당대에 같이 활동하던 많은 드라이버들 보다 모스는 더욱 뛰어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들 – 되도록 영국국적의 팀에서 뛰려고 했던 그의 의지와 워크스팀 보단 독립팀을 선호했던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리를 위한 투지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수 많은 불운들로 그는 챔피언이 될 수 없었다

 

 

 

모스와 마이크 호손(우)

 

 

 

1958년 당시 그는 영국인 최초의 F1 챔피언이 되는 마이크 호손(Mike Hawthron)에게 4번의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고도 단 1점차로 패하며 챔피언 자리를 내주고 만다. 당시 시즌막판에 모스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주는데 바로 그의 스포츠맨십이었다.

 

 

당시 시즌 종료까지 두 번의 그랑프리만을 앞둔 가운데 열린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그와 선두를 다투던 호손은 트랙을 역주행 했다는 혐의로 실격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친구이자 라이벌인 호손을 위한 모스의 사려깊은 변호는 페라리 소속의 그가 2위로 들어올 수 있게 해줬고, 이는 그해 챔피언십에서 1, 2위를 가르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카사블랑카(주: 모로코의 휴양도시)에서 열린 시즌 마지막 그랑프리에서 모스는 챔피언 타이틀을 따기위해 무조건 우승이 필요해야 했고, 정말로 우승을 차지하지만 호손이 2위를 차지하면서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고 만다. 모스가 항상 선두를 질주할 동안 호손은 전략적인 레이스 운영으로 모스의 벤월(Vanwall)팀 팀 메이트보다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했고 경기 막판에는 같은 페라리 팀 동료인 필 힐(Phil Hill)을 제치고 2위로 들어올 수 있었다.

 

 

비록 호손의 이름이 챔피언 트로피에 새겨졌지만 적어도 호손 본인과 페라리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가 모스보다 뛰어난 드라이버라는 환상속에 빠져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듬해에도 모스는 챔피언 타이틀을 또 놓치게 되는데 BRM 소속으로 쿠퍼-클라이맥스 팀의 잭 브라밤(Jack Brabham)을 상대로 모스는 9번의 그랑프리에서 오로지 3번만 완주를 했다. 그러나 그 3번의 완주에서 2번의 우승과 1번의 2위를 달성한다.

 

 

BRM 머신의 낮은 신뢰성에도 불구하고 모스는 챔피언 타이틀을 최종전인 플로리다 셰브링(Sebring)까지 끌고 나가면서 챔피언의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했었다. 그리고 그는 폴 포지션을 차지하면 챔피언의 희망을 키웠다. 물론 머신이 다시 한 번 말을 안듣는 바람에 이는 무산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1957년 아인트리(Aintree)에서 열린 유럽 그랑프리를 우승하고 팀 메이트인 토니 브룩스(Tony Brooks 좌)와 함께

 

 

 

1960년 스파(Spa)에서의 대형사고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모스는 그해 시즌을 통째로 날려보내야 했지만 이듬해인 1961년 복귀하게 된다. 비록 그가 몰던 로터스 18 머신이 ‘상어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우아한 페라리 156에 비해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해 모스는 두 번의 위대한 레이스를 팬들에게 선사해줬다.

 

 

모나코(Monaco)와 뉘르부르크링(Nurburgring)에서 그는 페라리의 머신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승리를 가져갔는데 두 대회 모두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기억될 대회였다.

 

 

하지만 그 해 시즌은 모스의 마지막 풀타임 시즌이 되고야 말았는데 1962년 4월 23일 굿우드(Goodwood)에서의 사고가 그의 커리어의 마침표를 찍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F1 말고도 다른 곳에서 열리는 레이싱에도 참여했었는데 당시 그가 몰던 로터스 차량이 알 수 없는 이유로(물론 그 당시 대부분이 그렇듯 기계적인 결함이라는 가능성이 아주 높다) 트랙을 벗어나 잔디 제방에 부딪히면서 그는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사고로 그는 한달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었고 몸의 왼쪽에 부분적으로 마비가 찾아와 다시 레이스에 복귀하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개인 연습에서 (물론 사고가 났던 굿우드에서도 했었다.) 그는 랩타임을 기록할때마다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꼈고 결국 아쉽게도 은퇴를 발표하고야 만다.

 

 

1962년 굿우드에서의 모스의 사고

 

 

 

그의 은퇴는 다양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드라이버로 여기고 있는 그의 커리어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이런 평가는 그의 다재다능함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 당시 많은 그랑프리 드라이버들은 다른 레이싱 카테고리에도 참가했었는데 모스는 그가 참가하는 모든 레이스에서 최고의 모습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F1 그랑프리가 아닌 1955년 밀레 밀리아(Mile Miglia)(당대 최고의 스포츠카들이 1000마일을 달렸던 레이스)에서 그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모스는 이 대회에서 전설의 반열에 들어서는데, 코-드라이버(co-driver)로 페이스 노트(주: 랠리 등에서 드라이버에게 길이나 기어변속등을 알려주는 동승 드라이버)를 읽어주던 저널리스트 데니스 젠킨슨(Denis Jenkinson)과 함께 그는 자신보다 레이싱 코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드라이버와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메르세데스-벤츠의 300SLR을 탄 그는 당시 F1 팀 메이트였던 후안 마누엘 판지오를 30분가량 앞서며 대회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1955년 밀레 밀리아에서의 모스와 코-드라이버 데니스 젠킨슨

 

 

 

당시의 이 승리는 50년대 F1을 지배하던 모스와 판지오 둘 중 모스가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을 단지 이런 결과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

 

 

이 둘은 1955년 메르세데스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당시의 결과로보면 누가 빠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스는 그해 딱 한번 그것도 고국인 영국 그랑프리에서 판지오를 이겼다. 당시 모스는 판지오가 모스를 우승시키기 위해 일부러 져줬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판지오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의심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었다.

 

 

판지오에 대해 그가 월드챔피언을 차지했었던 팀이 페라리의 수장 엔초 페라리(Enzo Ferrari)는 모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모스는 판지오가 자신보다 더욱 뛰어난 드라이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엔초 페라리는 모스를 1930년대 전설적인 드라이번 타지오 누보라리(Tazio Nuvolari)와 함께 최고의 드라이버라고 여기고 있었다.

 

 

페라리의 모스에 대한 찬사는 그가 사고로 은퇴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페라리 머신에 모스를 앉히기 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50년대의 전설 후안 마누엘 판지오(좌)와 스털링 모스

 

 

 

어떻게든 모스를 시트에 앉히기 위해 페라리는 그를 계속해서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모스는 페라리에서 뛰는 것은 아주 기쁜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팀(친구인 롭 워커(Rob Walker)가 운영하던 개인 독립팀)의 파란색 차를 더 몰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반응에 결국 페라리도 수긍을 하고 만다.

 

 

당시 이 상황에 대해 모스는 “당시엔 전 그게 꽤나 공평한 양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이후 전 거의 죽을뻔한 사고를 당하고 말았죠. 참 불행하게도 결국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페라리는 당시 모스가 챔피언에 오르지 못한게 조악한 포인트 방식이라고 생각한 인물 중 한명이었지만 모스 본인은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20년 후 활약하는 그의 후배 질 빌르너브(Gilles Villeneuve)처럼 그 역시 가장 중요한 레이스는 그 본인이 뛰는 것이었지 챔피언이 되기 위한 것은 그리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일전에 그가 말하길 “저에겐 말입니다. 단지 포인트를 따기 위한 레이싱은 레이싱의 모든 것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제가 빌르너브의 드라이빙 스타일을 존경하는 이유기도 하고요. 만약 당신이 어떻게서든 우승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무슨 의미겠습니까?” 또한 “제가 관여하는 한 그 어느 드라이버라도 자신이 뛰고 있는 레이싱에서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엔 챔피언십은 그들에게 그렇게 큰 의미가 되지 않을거라 봅니다.”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9631769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제키 스튜어트(Jackie Stewart)


국적 : 영국

그랑프리 참여 : 100회

월드챔피언 : 3회 (1969년, 1971년, 1973년)

그랑프리 우승 : 27회

포디엄(시상대) : 43회

폴 포지션 : 17회

기타사항 : 영국 유일의 트리플 챔피언

               F1 안전개선에 대한 공로로 2001년 영국여왕으로 부터 기사작위 수여




제키 스튜어트는 99번의 그랑프리에 걸쳐 3번의 월드 챔피언과 27번의 그랑프리 우승이라는 거대한 족적을 F1 역사에 남겼고 이는 F1 역사에서도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남긴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튜어트는 현역시절 당시 가장 뛰어난 드라이버 중 한명으로 자처할 정도의 드라이버라고 할 수 있는데, 1968년 중순부터 그가 은퇴를 선언한 1973년까지 그는 모든 사람들이 손꼽는 최고의 드라이버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록보다도 더욱 위대한 업적을 세운 드라이버라 할 수 있다. 꾸준한 안전 캠페인을 통해 스튜어는 F1의 위험성이 크던 시기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현대의 F1의 모습을 만드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드라이버들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려고 했지만 오로지 스튜어트만이 안전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드라이버였다. 그는 F1을 현대의 검투사 싸움과 같다는 생각을 거부했고 오히려 이를 스포츠로 여겨 그 누구도 죽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스튜어트는 안전벨트를 착용한 최초의 드라이버 였으며, 서킷에 방호벽을 설치하고 방염소재 옷을 만들고 피트월과 6개의 연결점을 가진 현대의 안전벨트, 그리고 머신의 충돌 구조변경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항은 그가 현역으로 있던 시절에 주장해왔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전 켐페인은 1973년 은퇴를 선언한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현재의 모든 F1 드라이버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보다 안전문제에 민감했던 스튜어트




물론 지금 들으면 스튜어트의 안전 캠페인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들리겠지만 그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사정이 달랐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 까지 안전에 대한 생각은 지금과 달라서 스튜어트는 그의 행동에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이를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안전 캠페인에 관해
“제가 현역이었을땐 말이죠. 안전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선 말을 안 하는게 더 낫었죠. 아마 제가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만 했다면 지금보다 더 친숙한 월드 챔피언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살아있진 않았겠죠” 라고 말했었다.



그가 안전 캠페인을 시작한 계기는 아무래도 1966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당한 사고 때문일 것이다. 당시 그는 뒤집힌 머신 안에 연료가 새고 있는 상황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고, 구출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뛰어난 레이싱 재능으로 이런 잘못된 점을 개선해낼 수 있는 드라이버였다.



그의 능력은 엄청난 자신감과 함께 F1 데뷔부터 나타났는데, 1965년 당시 스튜어트는 로터스(Lotus)팀의 입단제의를 거절하고 BRM팀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 로터스 소속이었던 짐 클락(Jim Clark)과 함께 뛰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클락은 모든 드라이버들이 우러러 보는 우상과 같은 드라이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튜어트가 후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고 명확해 보였다.



클락은 그해 로터스 25와 33머신으로 시즌을 지배했지만, 스튜어트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BRM머신으로 클레몽 페랑(Clermont Ferrand)에서 열린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2위를 기록했고, 또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생애 첫 그랑프리 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2년 동안 BRM팀의 경쟁력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1968년 스튜어트는 새롭게 탄생한 티렐-마트라(Tyrell-Matra)팀으로 이적한다. 그해 초 친구인 클락이 사고로 사망하지만 스튜어트에겐 그가 F1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데는 큰 기회였다. 그중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역시 뉘르부르크링(Nurburgring)에서 열린 독일 그랑프리의 승리였다. 당시 그는 비와 안개를 뚫고 2위와 무려 4분 차이로 우승한다.



 

짐 클락(우)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스튜어트



 

1968년 스튜어트는 시즌 초반에 부상만 아니었어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당시 그 부상으로 그는 초반 두 번의 그랑프리를 빠져야만 했고 시즌 마지막 그랑프리였던 멕시코 그랑프리에서도 리타이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부상이 1969년 타이틀 획득에는 영향을 전혀 주지 않았다.



69년 시즌 스튜어트와 티렐-마트라 팀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르셀로나 몬주익 파크(Montjuic Parc)에서는 2위와 2바퀴 차이로 이겼고 클레몽 페랑과 실버스톤(Silverstone)에서도 한 바퀴 이상 차이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마지막 승리를 기록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선 요헨 린트(Jochen Rindt)와 치열한 배틀을 벌이며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 마트라와의 계약이 끝나자 티렐은 경쟁력인 떨어지는 마치의 섀시로 고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1971년 팀은 섀시를 자체 제작했고 이 머신으로 스튜어트는 다시 시즌을 압도해나갔다. 자신이 폴 포지션을 세운 기록보다 1초나 빠른 코스 레코드를 기록하면서(그것도 앞바퀴 브레이크만 작동하던 머신으로) 우승한 모나코 그랑프리를 포함해 6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1972년엔 복통으로 타이틀 도전에 실패하지만, 다음해에 생에 3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다. 34살의 나이에 모든 것을 이루고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그였지만 5번의 우승을 기록하면서도 그는 시즌 초부터 생각했던 은퇴를 마음먹기로 한다.



1973년 모나코 그랑프리를 우승한 스튜어트




그의 은퇴는 아주 비밀스럽게 준비했는데, 심지어 부인인 헬렌이 걱정할까봐 은퇴에 대한 말도 꺼내지 않았을 정도였다. 어쨌든 스튜어트는 그의 팀 메이트 였던 프랑스 출신의 프랑수와 시버트(Francois Cevert)를 후임으로 지정하고 은퇴를 발표한다. 이미 챔피언을 확정한 상태에서 자신의 100번째 그랑프리이자 시즌 마지막 그랑프리가 열린 미국의 왓킨스 글렌(Watkins Glen)서킷은 은퇴하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그러나 그는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버트가 퀄리파잉 도중에 사고로 사망하고 말자 그는 레이스 포기를 선언했고,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고 그의 부인에게 자신의 은퇴를 말하게 된다.


어쨌든 당시 그가 기록한 27번의 그랑프리 우승은 짐 클락이 가지고 있던 그랑프리 우승기록을 깨는 것이었는데, 스튜어트의 기록이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에 의해 깨질 때 까지 14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면 그가 이룩한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 현대의 F1 그랑프리는 스튜어트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 비해 더 많아졌고 머신의 안정성역시 당시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그의 그랑프리 우승횟수는 F1역사를 통틀어 6위를 기록하고 있다.


스튜어트의 드라이빙 스타일은 단순하면서도 큰 노력이 들지는 않는 느낌이었는데 그가 평소에 좋아하는 ‘머신이 알아서 가게 하라’라는 말처럼 부드러운 드라이빙을 보여줬었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아주 부지런한 성격의 사람이다. 은퇴 후 그는 레이싱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이용해 수익성 있는 사업과 각종 미디어에 뛰어들었고 그의 이런 활동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은퇴 드라이버들과 달리 그는 1997년부터 99년까지 자신의 팀으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는데, 엔진을 공급하던 포드(Ford)사에 거액으로 팀을 넘기기 전에 조니 허버트(Johnny Herbert)가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에머슨 피티팔디(좌) 니키 라우다(우)와 함께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스튜어트




스튜어트가 건강하던 시절 마이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과 왕족에 대한 그의 애정이 때로는 그를 짜증나는 사람으로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교양 있는 말재주에 혜안을 가진 인물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의 현역시절 영향력과 은퇴 후의 성공사례는 73살의 나이인 지금에도 그를 현재 F1의 스타들만큼이나 유명하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9487080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세바스찬 베텔(Sebastian Vettel)


국적 : 독일

그랑프리 참여 : 101회

월드챔피언 : 3회 (2010년, 2011년, 2012년)

그랑프리 우승 : 26회

포디엄(시상대) : 46회

폴 포지션 : 36회

기타사항 : F1 최연소 챔피언, 더블 챔피언, 트리플 챔피언

※ 현역드라이버로 표시된 기록은 2013년 2월 현재 기록임




60년이 넘는 F1 역사에 위대한 드라이버들을 순위로 매기는 과정은 상당히 어렵고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작업 중에 하나다. 특히 현재까지도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는 전후(戰後)세대를 순위에 넣는 것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세바스찬 베텔이 이 리스트에서 8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은 없을 것으로 본다.레드불(Red Bull)소속의 이 드라이버는 현재까지 정말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22번의 그랑프리 우승을 비롯하여(산술적으로 4번의 한번은 우승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33번의 폴 포지션 그리고 최연소 F1 더블챔피언까지 25세의 나이로 5시즌 만에 이뤄낸 업적이다. 산술적으로 베텔의 이런 기록들은 그를 이 리스트 상에서 가히 최고의 드라이버로 만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통계들은 크게 유의미 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베텔에게 있어서 그의 짧은 커리어를 통틀어 3시즌동안 강력한 머신을 가졌던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머신이 좋다고 해도 드라이버의 능력이 좋아야 하는걸 생각해본다면 베텔은 확실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선대 드라이버들이라 할 수 있는 짐 클락(Jim Clark)이나 알베르토 아스카리(Alberto Ascari)처럼 베텔은 초반부터 편히 챔피언십 리드를 지켜 나갔다. 강력한 레드불 머신은 그를 폴 포지션에 앉혀 주었고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 코너에서부터 리드를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줬다. 베텔을 꺾는 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베텔의 모습은 특히 그의 두 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던 2011년 시즌에 두드러졌는데, 일반적인 통념들을 엎으면서 퀄리파잉 랩의 기록을 남기는 모습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베텔의 팀 메이트인 마크 웨버(Mark Webber)는 마지막 한 랩에 올인하는 전략에 아주 능했는데 이건 웨버가 퀄리파잉에서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재능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베텔이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페이스로 퀄리파잉의 마지막 랩을 돌면 그의 집중력은 팀원들도 상상하지 못했던 랩타임을 만들어냈고 팀 메이트인 웨버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면서 그의 기록을 받아드릴 수 밖에는 없게 했다.



201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베텔




퀄리파잉에서의 베텔의 능력은 핏 레인에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외심을 가져다 주게 만들었다. “최근에 베텔이 퀄리파잉에서 실수를 한게 언제지?”라는 질문에 그의 한 라이벌은 “글쎄 한 3년전??”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베텔은 꾸준히 그의 능력들을 보여줬고 특히 2010년과 2011년 시즌엔 그를 F1 역사에 빠른 드라이버들과 함께 비교할 위치에 놓이게 해줬다.


“그에게 퀄리파잉에서 1위를 할 머신을 줘보세요.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런 조건에서 베텔은 아일톤 세나(Ayrton Senna)와 비슷하거나 더 뛰어날 수 도 있을거에요” BBC F1 기술 분석위원인 게리 엔더슨(Gary Anderson)은 위와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비슷한 이야기들이(물론 확신할 순 없지만) 핏레인의 드라이버들과 팀 보스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은 페라리(Ferrari)의 페르난도 알론소(Fernando Alonso)가 올-라운드 드라이버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퀄리파잉랩이나 선두로 치고 올라가는 머신의 능력으로는 베텔이 빠르다는 의견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의견들은 아무래도 베텔이 토로 로쏘(Toro Rosso)소속으로 비가 내리던 몬자(Monza)에서의 강렬한 폴 포지션과 우승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의 첫 우승은 그가 우승을 위해서는 반드시 최고의 차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의 우승은 언제나 하위권에 있던 미나르디(Minardi)를 계승한 토로 로쏘를 중위권 팀으로 끌어 올리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비록 이 우승이 베텔을 특별한 드라이버로 만들어 줬지만, 단순히 우승만으로 그렇다고 하기엔 아래의 사실들과는 잘 맞지 않는 점이 있을 수 있다.



2008년 생애 첫 우승이자 F1 역사상 최연소 그랑프리 우승을 달성한 베텔




토로 로쏘는 2008년에 레드불의 주니어팀으로서 엔진을 제외한 모든 파츠들이 레드불과 같았다.(엔진은 레드불이 르노(Renault)엔진을 사용한 반면 토로 로쏘는 페라리 엔진을 사용했다) 2008년 시즌 3분의 2가 지날 무렵 토로 로쏘는 퀄리파잉에서 매 레이스 마다 6위정도의 성적을 찍어낼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오게 된다.


사실 그해 시즌 중반까지도 베텔은 그의 팀 메이트인 세바스티앙 부르다스(Sebastien Bourdais)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로 로쏘의 테크니컬 디렉터인 조르지오 아스카넬리(Giorgio Ascanelli)에 의하면 발렌시아(Valencia)에서 열렸던 유럽 그랑프리에서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아스카넬리에 의하면 베텔은 그 때 F1 머신을 빠르게 모는 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깨달음은 큰 변화를 가져다 줬는데 그 스스로 스피드를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스피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게 해준 것이었다.



그 이후로 베텔은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몬자에서의 승리 이후 베텔은 그해 시즌 토로 로쏘에서 인상적인 드라이빙을 보여주며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2009년 시즌 그는 상위팀인 레드불에서 타이틀을 경쟁하는 위치에 올라섰고 몇몇 레이스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몇몇 실수로 인해 딸 수 있던 타이틀을 브런(Brawn)의 젠슨 버튼(Jenson Button)에게 패하며 내주고 만다. 그리고 그런 실수들은 2010년 시즌에도 나타났다. 가장 빠른 머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베텔은 시즌 마지막 그랑프리였던 아부다비 그랑프리 전까지 챔피언십에서 선두를 유지한 적이 없었다. 다행히 페라리의 전략 실수가 알론소의 기회를 앗아가 버리게 한 덕분에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


베텔은 레이스를 내내 지배하며 우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머신의 신뢰성 문제로 인해 승리를 놓쳐버린 적이 많았다. 특히 바레인, 호주 그리고 한국에서 그랬다. 결과야 어쨌든, 그가 터키에서 팀 메이트와 충돌하지만 않았어도, 실버스톤 콥스(Copse)코너에서 웨버의 바깥쪽으로 나가려다가 펑쳐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그리고 헝가리에서 세이프티카 상황에서의 판단미스와 벨기에에서의 또 한번의 충돌만 없었어도 그는 챔피언 타이틀을 더 일찍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무언의 압박감 역시 작용해서 싱가포르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는 알론소에게 폴 포지션을 내주고 레이스 당일에 승리까지 내주기도 했다. 이런 베텔의 드라이빙 특성은 때때로 그 안 좋은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쨌든 2010년의 베텔의 챔피언 타이틀은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이 가지고 있던 기록을 경신하며 최연소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했고, 다음해인 2011년에는 알론소의 기록을 깨면서 최연소 더블 챔피언에도 오르게 된다.



 

2011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월드 챔피언을 확정한 베텔



 

특히 두 번째 챔피언 타이틀 도전은 전년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는데, 베텔은 시즌 내내 챔피언십 리드를 유지하며 11번의 우승과 15번의 폴 포지션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2011년 시즌 그는 특유의 드라이빙 스킬과 꾸준함으로 2010년 시즌과는 다른 레벨에 올라섰다는 것을 보여줬는데 특히 몬자에서 알론소를 바깥쪽으로 파고들어가 추월하는 장면은 그가 레이스 운영을 잘 못한다는 의견을 일축시키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 예였다.


그러나 올 시즌(주: 2012년) 베텔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09-10년 보다는 적은 실수와 더욱 강해진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2011년과 같은 압도적인 모습은 보여주고 있진 않다. 비록 그가 팀 메이트인 웨버와 달리 피렐리(Pirelli) 타이어와 레드불 머신에 일찍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직까지 베텔이 챔피언십에서 리드를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큰 편인다. 그러나 그와 웨버가 다시 경쟁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와 있다. 베텔의 퀄리파잉 기록은 때때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발렌시아와 캐나다에서의 압도적인 폴 포지션을 생각해 본다면) 2010년이나 2011년과 같이 꾸준하진 않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흥미로운 통계가 있는데 그동안의 베텔의 그랑프리 우승에서 낮은 그리드에서 출발했던 것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도 3그리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2012년 유럽 그랑프리에서 리타이어하고 개러지로 들어오던 베텔




많은 것을 어린 나이에 이뤘기에 대부분의 F1 최연소 기록들은 베텔이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가 그의 재능과 F1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완전히 깨닫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까지의 베텔은 의심의 여지없이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안 좋은 조건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머신으로 우승을 차지하거나 해밀턴 혹은 알론소와 같은 팀에 있으면서 승리를 따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더욱 위대한 드라이버로 역사에 남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9051559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니키 라우다(Niki Lauda)


국적 :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참여 : 177회

월드챔피언 : 3회 (1975년, 1977년, 1984년)

그랑프리 우승 : 25회

포디엄(시상대) : 54회

폴 포지션 : 24회

기타사항 :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 챔피언을 차지한 F1의 불사조

               페라리와 맥라렌에서 모두 챔피언을 차지한 유일한 드라이버



니키 라우다가 페라리 머신에서 내려와 인상을 찡그리며 헬멧을 벗었다. 헬멧을 벗은 그의 방염 마스크는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 시간 반 동안의 레이싱을 마치고 조심스레 마스크를 벗으려고 했지만 마스크는 얼굴을 덮고 있던 붕대와 늘러 붙어 있었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마스크를 벗었다.



1976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라우다는 4위를 기록했다. 독일 뉘르부르크링(Nurburgring)에서의 사고로 인한 화상으로 병상에 누워 병자성사를 받은 지 42일 만에 돌아와 기록한 순위였다.


그의 1976년 몬자(Monza)에서의 레이스는 정말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용감한 행동이었을까?


불안한 챔피언십 리드와 그의 페라리에서의 상황을 생각하면 라우다는 그의 상태를 무시하고 레이스에 참여해야 했다. 후에 그는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레이스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다고 말했다.


“저는 계속해서 제 안의 두려움을 빨리 그리고 완전히 없애야 했다고 말했죠” 라우다는 자신의 솔직한 전기인 ‘지옥에서 돌아와(원제 : To Hell And Back)’에서 “솔직히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그건 제가 겁을 먹고 있다고 제 라이벌들에게 시인하는 꼴이었지요. 정말 바보같은 일이었죠. 어쨌든 몬자(Monza)에서 전 엄청나게 겁을 먹은 상태였죠” 라고 시인했다


라우다는 당시 몬자에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최상의 상태라고 느꼈기에 그랑프리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있을 동안 뉘르부르크링에서의 사고를 생각하면서 그는 “완전히 끝장날 뻔 했지”라고 되뇌었다.




1976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복귀 기자회견을 하는 라우다



어쨌든 그의 의지력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할만하다.


완치가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을 입고 거기에 화상으로 손상된 눈꺼풀을 재건하기 위한 성형수술을 앞둔 상황에서 그는 다시 자신을 사지로 몰았던 머신위에 올라탔다. 물론 그의 몸 상태는 생각보다 더 안 좋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세대의 페라리 머신 중에서 가장 높은 4위를 기록했다.



뉘르부르크링에서의 라우다의 사고는 F1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드라이버 중 한명인 그의 커리어에 매우 큰 사건이었다.


라우다는 매우 개인적인 성격에 무뚝뚝하며 지극히 사무적인 마인드를 가진 거기에 유머감각이라고는 없는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그는 커리어를 통틀어 25번의 그랑프리를 우승하고 3번의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거기에 2년이라는 ‘은퇴’기간이 있었기에 그는 왠만한 위대한 드라이버 순위에 이름을 기록하는 드라이버가 되었다. 그런 결과에도 그가 처음에 F1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라우다는 1971년 마치(March)팀에서 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대출을 해서 시트를 얻었다. 그리고 2년 뒤 BRM으로 이적할 때 또 다시 대출을 하게 된다.



데뷔한지 3년만에 라우다는 현재(주: 2012년) 페라리의 회장인 루카 디 몬테제몰로(Luca 야 Montezemolo)와 함께 페라리에 입성한다. 데뷔 후 3년간 최악의 시즌을 보낸 그는 페라리를 재건하며 F1을 지배하게 된다. 경험미숙으로 인한 손해는 페라리에서 그가 데뷔하던 시즌은 1974년 시즌에 불과했다. 1975년 시즌 F1역사에 길이 남는 명차인 페라리 312T와 함께 시즌을 지배하며 챔피언에 오른다.



1976년 시즌에도 초반 9번의 그랑프리에서 5번의 우승과 2번의 2위 그리고 한번의 3위의 기록하며 손쉽게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듯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그의 목숨을 앗아갈뻔했던 뉘르부르크링 사고를 겪게 된다.



당시 라우다는 뉘르부르크링이 F1을 치르기에 매우 위험한 서킷이라고 수차례 밝힌적이 있었다. 그는 아이펠(Eifel)산을 따라 개설된 이 20킬로미터가 넘는 서킷에서는 응급조치가 이뤄지긴 너무 멀다고 강조하면서 만약 드라이버가 사고를 당한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리고 8월 1일 그의 사고는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라우다는 베르크베르크(Bergwerk) 코너를 들어오면서 전속력으로 미끄러졌고 방호벽과 충돌하면서 그의 머신은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1976년 독일그랑프리에서의 라우다의 사고



충돌 후 머신에 갇혀있었지만 의식은 있었고 다행히 그는 뒤따라오던 네 명의 드라이버에 의해 머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얼굴에 화상과 유독가스를 흡입하고만 상태였다.



그날 이후로 그는 얼굴에 화상으로 인한 상처로 오른쪽 귀를 거의 잃은 채 살아야 했고 그의 이런 흉측한 얼굴에 언제나 덤덤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다. 그의 외모에 대해서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만약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낀다면 그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밝혔다. 사실 라우다의 사고는 평소 그의 무자비한 행동의 말로라는 생각도 든다.



레이스가 다시 시작 되면 처음 레이스가 시작할 때의 기록은 삭제된다는 규정으로 인해 그의 1976년 독일 그랑프리 기록이 공식적으로는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된 것에 대해 묻자 그는 “맞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상당히 단호한 톤으로 “자 근데 제 귀에는 어떤 일이 생겼는지 보이시죠?” 라고 되물었다.


어쨌든 그 사고로 라우다는 2번의 그랑프리를 불참하게 되었고, 맥라렌 소속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제임스 헌트(James Hunt)에게 챔피언십 포인트 격차를 줄이게 만드는 발단을 제공하고 만다. 마지막 그랑프리였던 일본 그랑프리 직전까지 라우다는 헌트에게 단 3점차로 앞서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 그랑프리 레이스 당일, 심한 폭우가 몰아치면서 레이스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모든 드라이버들은 처음에는 레이스 참가를 거부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위는 대회를 강행하기로 했고 라우다를 포함한 세 명은 레이스 참가를 거부하고 만다. 페라리는 그와 함께 조직위의 결정에 항의하면서도 그를 레이스에 다시 참여시키기 위해 그를 계속 설득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결국 헌트는 3위를 기록하면 단 1포인트 차로 라우다를 꺾고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다.


엔초 페라리(Enzo Ferrari)는 라우다의 결정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는 이전에 라우다의 사고 이후 당시 페라리의 미비한 지원과 함께 둘의 관계를 최악으로 치닿게 하는 결정타였다.



엔초 페라리(좌), 그리고 루카 디 몬테제몰로(우)와 함께한 라우다




1977년 라우다는 페라리에 계속남아 두 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지만 시즌 막판의 두 번의 그랑프리를 불참하고 바로 브라밤(Brabham)으로 이적해 1978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파 로메오(Alfa Romeo) 엔진을 장착한 브라밤의 머신은 경쟁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물건이었고, 그렇기에 자연히 라우다의 F1에 대한 열정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다음해 시즌 막판 그는 은퇴에 대한 마음을 먹기로 하고 그 결정을 바로 따르기로 한다. 캐나다 그랑프리 연습 세션이 한창 있던 도중에 라우다는 브라밤 팀의 수장이었던 버니 에클스턴(Bernie Ecclestone)을 데려와 “서킷을 뱅뱅 도는게 지루하다”고 말하면서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를 선언하고 그는 헬멧과 레이스 용품 모두를 남겨두고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자신의 항공사를 경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2년 뒤 맥라렌의 수장이었던 론 데니스(Ron Dennis)는 라우다를 설득하여 그를 F1으로 복귀하게 했고, 복귀 첫해 3번의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2년 후 라우다는 시즌을 지배했던 맥라렌 머신과 함께 팀 메이트인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를 노련미로 누르면서 역대 최소 점수 차인 0.5점차로 3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다. 당신 이 두 맥라렌 듀오는 16번의 그랑프리에서 12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을 차지했던 1984년 알랭 프로스트(우)와 함께




1985년 라우다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물론 프로스트를 막아내면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시즌 막판이 은퇴를 위한 최적의 시기라 판단하고 다시 한 번 은퇴를 발표한다. 은퇴 후 그는 독일 RTL 방송국에서 해설을 했고 그의 특유의 예리한 분석과 유머는 서킷 밖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라우다는 상당히 우아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경제적 도움이 필요하거나 돈을 모을 때 그는 절대로 그걸 무모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드라이빙에서는 무모할 정도로 빠른 드라이버였다. 또한 그는 공학이나 팀 내 정치적인 일에도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순수히 재능만으로 따진다면 그가 질 빌르너브(Gilles Villeneuve), 페르난도 알론소(Fernando Alonso) 그리고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 보다 위에 있을 수 있을까?? 그렇진 않은거 같다. 그러나 그 어느 스포츠맨도 죽음의 문턱에서 두 번이나 정상에 오른 라우다의 커리어를 비슷하게 따라가지 못했기에 그가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이런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신 피트크루로 활약했던 나이젤 뢰벅(Nigel Roebuck)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8957703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페르난도 알론소(Fernando Alonso)


국적 : 스페인

그랑프리 참여 : 198회

월드챔피언 : 2회 (2005년, 2006년)

그랑프리 우승 : 30회

포디엄(시상대) : 86회

폴 포지션 : 22회

기타사항 : 슈마허의 연승행진을 깨뜨린 드라이버
               2013년 현재 F1 최고액 연봉자

※ 현역드라이버로 표시된 기록은 2013년 1월 현재 기록임




스페인 북부의 에스투리아스(Asturias)는 예로부터 험난한 산악지형으로 용맹하고 거친 용사들의 도시로 이름을 알려왔다. 이곳 출신의 페르난도 알론소는 그야말로 이 지역이 낳은 최고의 용사일 것이다.



F1 역사에 있어서 그만큼 끈질기고 살벌한 드라이버는 없었다. 매 랩마다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극한의 드라이빙과 머신의 한계를 넘어서는(설령 머신이 망가졌다 하더라도) 모습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능력이라 할만하다. 그의 이런 능력은 그동안 그가 30번의 그랑프리를 우승하게 만들었던(F1 전체에서도 5위에 들어가는) 원동력이었다. 또한 올해(주: 2012년)의 우승들 만큼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줬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올 시즌(주: 2012년)이 시작하고 나서 페라리는 퀄리파잉에서 5위를 기록한게 최고의 성적이었다. 초반 8번의 그랑프리에서 알론소의 평균 퀄리파잉 성적은 8위였다. 그러나 8번의 그랑프리를 치른 후 그는 챔피언십 포인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지난 독일 그랑프리(주: 2012 독일 그랑프리)의 우승으로 올 시즌 세 번째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한 지금까지도 그는 포인트에서 선두에 서있다.




2012년 독일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 알론소




남들이 보기에 그의 이런 재능이 엄청난 선물이라 보겠지만, 알론소는 그런 반응에 상당히 겸손한 태도를 보여왔다. 2009년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마도 전 빠른 드라이버는 아닐 겁니다. 물론 재능을 타고나지도 열심히 노력하는 타입도 아닙니다. 하지만 전 꾸준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항상 서킷에 있으니깐요”



그의 이런 말은 어느 조건에서나 불안정한 머신에서도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과감한 추월 능력과 영리한 드라이빙을 구사하는 평소 모습과는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평소 그가 라이벌들과 비교할 때의 차이를 본다면, 그가 평소하는 이런 말들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알론소가 확실히 빠른 드라이버이긴 하지만 퀄리파잉에서 뭔가 특별한 모습을 보여줄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아무래도 2011년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의 모습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의 그런 모습은 현재 같이 활동하고 있는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이나 세바스찬 베텔(Sebastian Vettel)에 비하면 흔한 일은 아니며 심지어 아일톤 세나(Ayrton Senna)가 간혹 보여줬던 실망스런 모습 만큼 자주 있는것도 아니다.



어쨌든 역설적이게도, 평소에 알론소는 머신의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그만의 재능으로 이를 매꿔버리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모습의 좋은 예는 역시 2006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일 것이다. 그는 소속팀인 르노(Renault)가 리어윙 부분의 바디워크를 충분히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도 5위로 퀄리파잉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물론 후에 스튜어드들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페널티를 받게 되지만 말이다) 그의 엔지니어들이 후에 그의 차량이 얼마나 퍼포먼스를 잃었는지 계산해 봤는데 이론적으로 그의 머신은 다른 차량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지난 10년간의 퀄리파잉 중에 가장 놀라운 퀄리파잉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이탈리아 그랑프리는 그의 더블 챔피언을 향한 도전을 상당히 위태롭게 만들었던 대회였다.



2005년 그는 생애 첫 챔피언 타이틀을 르노 소속으로 따낸다. 당시 그는 맥라렌(McLaren)의 키미 라이코넨(Kimi Raikkonen)의 빠른 머신을 상대로(빠른 만큼 신뢰성은 안 좋았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끈질긴 근성으로 따낸 타이틀이었다. 2005년의 우승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지만 알론소는 다음해 또 한 번의 역사를 쓰기위해 다시 챔피언 자리에 도전한다. 초반 압도적을 모습을 보여주면서 수월하게 타이틀을 따내는 듯 했으나, 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그를 왕좌에서 끌어 내리기 위해 치사한 수까지 사용하는 페라리(Ferrari)와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의 역습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이 둘의 대결은 일본 그랑프리가 열리는 스즈카(Suzuka) 서킷에서 결정나게 된다.과거 아일톤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 그리고 슈마허와 미카 하키넨(Mika Hakkinen)이 챔피언 자리를 두고 최후의 일전을 치뤘던 그 곳에서 말이다. 정작 경기는 36랩을 돌 때 슈마허가 6년 만에 엔진블로우를 일으키며 알론소의 우승으로 끝나고 만다. 다음 대회로 치러진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알론소는 포디엄에 오르면서 최연소 더블챔피언이라는 기록을 달성한다.(주: 아쉽게 이 기록은 2011년 세바스찬 베텔에 의해 깨진다)



 

2006년 알론소는 르노에서 더블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2002년 르노 팀의 테스트 드라이버로 입단한 그는 2003년에 젠슨 버튼을 대신하여 르노 팀의 정식 드라이버로 뛰게 된다. 이 결정은 당시 많은 영국 미디어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에 비판을 제기했던 사람들은 2001년 그가 당시 미나르디(Minardi)(주: 2005년 까지 존재했던 이탈리아 국적의 팀, 하위권의 대표적인 팀 중 하나였다)의 빈약한 머신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데뷔시즌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르노에서의 첫 시즌 그는 놀라운 퍼포먼스를 몇 번 보여줬고 헝가리에서는 생애 첫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데뷔시즌의 모습으로 그의 잠재력에 의문을 제기하던 사람들은 모두 없어지게 된다. 르노에서 성공적인 시절을 보낼 동안, 그의 평소 성격의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팀 메이트가 종종 그를 꺾을 때 그는 자신을 통제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2001년 미나르디에서 데뷔한 알론소



 

이런 모습은 그가 2007년 맥라렌에 입단하면서 큰 문제가 되고 마는데, 신인이자 팀 메이트인 루이스 해밀턴은 그를 이길 만큼 매우 빠른 드라이버였기 때문이다. 알론소와 해밀턴 이 둘의 대결은 하나의 대서사시처럼 긴장감이 넘치는 배틀이 되었고, 시즌을 통틀어 누가 우세하다고 꼽을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고 만다.



당시 알론소는 팀이 해밀턴을 더 밀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페라리의 라이코넨과 펠리페 마싸(Felipe Massa)를 이기고 타이틀을 차지할 사람은 단 한명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맥라렌에서 자신을 퍼스트 드라이버로 기용했고 해밀턴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둘 중에 챔피언이 되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부담감은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폭발하고야 만다. 알론소는 팀에서 해밀턴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스파이게이트(주: 2007년 시즌 맥라렌이 페라리의 기밀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혹으로 시작된 것이 사실로 판명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당시 맥라렌의 테크니컬 디렉터인 마크 코건은 2년 자격정지를 받고 맥라렌은 그 해 시즌 컨스트럭터 점수가 무효화 됐다.) 와 관련해 FIA에 출석하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이 사건은 맥라렌과 알론소의 관계를 파멸의 길로 인도하고 만다. 또한 알론소의 평판도 안 좋아지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고 현재까지도 이 둘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할 순 없는 상황이다. 2008년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의 승부조작 사건(주: 이른바 ‘크래쉬 게이트’라 불리는 사건으로 알론소가 소속되어있던 르노의 수장인 플라비오 브리아토레(Flavio Briatore)와 레이스 엔지니어들이 알론소의 팀 메이트였던 넬슨 피케 주니어(Nelson Piquet Jr.)에게 고의로 사고를 일으켜 알론소의 우승을 도우려 했던 사건)에 있어서도 알론소에 대한 의혹은 있었지만 본인도 이에 대해 부인했으며 또한 조사에서도 그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결과가 나오긴 했다.


그러나 맥라렌과의 갈등 속에서도(팀에서 자신보단 해밀턴이 챔피언이 되길 원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알론소는 시즌 막판까지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었다. 물론 결국엔 알론소와 해밀턴 둘 다 라이코넨에게 1포인트 차로 패배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맥라렌 시절 팀 수장이었던 론 데니스(Ron Dennis)(좌)와 알론소



시즌이 종료 된 후 알론소는 맥라렌과의 3년 합의를 상호 동의하에 해지하고 맥라렌을 떠난다. 레드불(Red Bull)과의 계약설도 있었지만 그는 친정인 르노로 돌아갔고 페라리에 새 시트가 나기 전 까지 기다렸고 그의 바람은 2010년에 이뤄진다. 만약 그가 레드불로 이적했었다면 2009년, 2010년, 2011년 모두 타이틀을 차지하며 5회 챔피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2007년에 그가 평정을 되찾고 맥라렌에 계속 남았더라면 적어도 4회 연속 챔피언도 가능했을 것이다.

 

 

알론소 본인도 이점에 대해 “저에겐 뭐 타이틀이 두 개나 있잖아요.”라며 머쓱해 한다. 물론 그의 이런 말을 다 믿을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의 행보를 다시 따라가 보면, 알론소는 2010년 페라리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3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딸 기회를 얻었었다. 비록 페라리의 머신이 레드불에 비해 퍼포먼스가 딸렸지만 팀의 재앙과도 같았던 전략 실패로 마지막 그랑프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그는 챔피언십 포인트에서 1위를 달렸었다. 아무튼 알론소는 페라리의 번영을 위해 필요한 타고난 리더라 할 수 있고 또한 팀 역시 그에게 잘 맞아 보이는 것 같다. 그 덕분인지 알론소는 페라리와 2016년까지 계약을 채결했다.

 



페라리 이적 후 해밀턴(좌)과 기자회견장에서




알론소와 해밀턴에게 있어서 서로 팀 메이트로 있던 시간은 서로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긴 시절이었다. 물론 그가 해밀턴을 라이벌로 인식하는 것으로 그동안의 문제들을 숨기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최근 알론소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해밀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최근에는 베텔이 향후 페라리로 이적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기뻐하고 있다.(또한 그는 해밀턴이 페라리로 이적하는 것에 대해선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해밀턴 역시 알론소와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지난 캐나다 그랑프리(주: 2012년)에서 우승한 뒤 그는 “전 페르난도와 달리는 게 좋아요. 그는 최고의 드라이버니깐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8826717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알베르토 아스카리(Alberto Ascari)

국적 : 이탈리아

그랑프리 참여 :33회

월드챔피언 : 2회 (1952년, 1953년)

그랑프리 우승 : 13회

포디엄(시상대) : 17회

폴 포지션 : 14회

기타사항 : F1 최초의 더블챔피언

               한 시즌에 참가한 그랑프리를 모두 우승한 유일한 챔피언



알베르토 아스카리는 현재의 F1 드라이버들과는 좀 많이 다른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의 두툼한 볼살과 통통한 몸매는 지금의 운동선수들의 마른 이미지보단 밀라노의 빵집 주인아저씨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대에 그랑프리를 재패하던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F1 드라이버들을 모호한 기준으로 특히 단순한 기록으로만 평가하려는 것은 아스카리의 진가를 확인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겐 절대로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위대한 업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1948년 아직 F1으로 재편되기 전의 영국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아스카리(좌)




1952년 벨기에 그랑프리부터 그 다음해 열린 같은 대회까지 아스카리는 모든 F1 그랑프리를 우승했다.



1952년에 그의 첫 번째 우승타이틀을 페라리 소속으로 따낼 때 그는 참가했던 모든 그랑프리를 우승하며 타이틀을 획득한다. 1953년 챔피언에 또 다시 오를 때까지 그는 13번의 그랑프리에서 11번이나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1955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커리어가 끝나지만 F1이 시작한 1950년부터 5년간 특히 51년부터 53년까지 3년 동안 그는 32번의 레이스에서 13번 우승을 했다. 이 40%를 넘는 승률은 오로지 후안 마누엘 판지오(Juan Manuel Fangio)만 넘었다.



이런 말만 들으면 당시의 그의 상대가 없었던 것처럼 들린다. 물론 1952년 시즌 페라리는 시즌을 지배했던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팀 메이트는 판지오를 꺾고 초대 F1 챔피언에 올랐고 판지오와 함께 알파 로메오(Alfa Romeo) 소속으로 뛰었던 주세페 파리나(Giuseppe Farina)였다.



1952년 시즌에 판지오가 부상으로 시즌을 날려버리긴 했지만 다음해 마세라티(Maserati) 소속으로 돌아왔고 또한 그 해에는 1951년 페라리에게 첫 실버스톤(Silverstone) 서킷에서의 승리를 선사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세 플로리안 곤살레스(Jose Frolian Gonzalez)도 있었다. 그리고 아스카리의 페라리 팀 메이트는 최초의 영국인 월드챔피언 마이크 호손(Mike Hawthorn)이었다.



사실 아스카리의 진면목을 알아본 사람은 팀 메이트인 호손이었다. 1958년 스털링 모스(Stirling Moss)를 간신히 꺾으며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이 영국인 드라이버는 아스카리에 대해 “판지오와 더불어 아스카리는 정말 제가 본 드라이버 중 최고에요”라고 평가했다. 그의 결과가 말해주듯, 아스카리는 무자비한 우승기계였다. 또한 그는 레이싱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달리는 침착한 드라이버였다.



 

초창기 F1을 수놓았던 인물들 왼쪽부터 주세페 파리나, 알베르토 아스카리, 마이크 호손, 루이지 비로레시



 

그의 푸른 옷과 헬멧은 페라리의 빨간 머신의 색과 함께 1950년대 F1을 대표하던 상징이었다. 그는 살짝 구부려 앉아서는 다른 드라이버들보다 달리 팔을 더 구부려 핸들을 상당히 가까이 잡은 체 운전을 했다.



그에 대해 엔초 페라리는(주: 페라리의 설립자) “아스카리는 정교하고 뛰어나 드라이빙을 보여 줬죠” 또한 “그는 항상 레이스 시작부터 선두를 지켰어요. 일단 선두에 서면 그 어느 누구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알베르토는 선두에 서면 안심하는 성격이었죠. 그때가 가장 그의 스타일이 빛나는 순간이었죠. 2위로 떨어지거나 더 아래로 내려가면 그는 불안해 했죠”라고 말했다



1952년과 1953년 사이, 아스카리는 그랑프리에서 선두를 거의 뺏기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 몬자(Monza)에서와 같이 뒤처지는 일이 있기도 했다. 이미 챔피언을 확정지은 상태에서 시즌 마지막 경기에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그는 팀 메이트인 파리나와 마세라티의 판지오 그리고 오노프레 마리몽(Onofre Marimon)과 경쟁해야 했다. 서킷의 마지막 코너인 파라볼리카(Parabolica)를 선두로 지나고 있던 그는 두 명의 백마커(선두보다 한 바퀴 이상 뒤쳐진 차량)를 지나고 난 뒤 뒷바퀴의 압력으로 미끄러지고 만다. 그리고 게임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당시에 그는 몰랐겠지만 이후로 아스카리는 그랑프리에서 단 1점의 포인트도 따지 못하게 된다.



 

빨간색 머신과 파란 옷 그리고 헬멧은 그만의 상징이었다.

(란치아 소속이던 1955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경제적인 이유가 컸지만, 1953년 시즌이 끝날 즈음 그는 페라리를 떠나 란치아(Lancia) 팀으로의 이적을 발표한다. 당시 란치아는 혁신적인 머신인 D50의 드라이버로 아스카리를 선택한 것이었다.



비록 아스카리가 밀레 밀리아(Mille Miglia) 도로 레이스(주: 1927년부터 1957년까지 열린 이탈리아의 내구레이스 대회)에서 악천후를 뚫고 승리를 차지했지만 1954년 시즌은 란치아의 프로젝트 연기로 날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해 시즌 막판 페라리는 그가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불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머신을 빌려줬지만 메르세데스(Mercedes)의 판지오에게 밀리며 엔진 블로우로 리타이어하고 만다. 란치아의 D50은 바르셀로나 페드랄베스(Pedralbes) 서킷에서 열린 시즌 마지막 대회였던 스페인 그랑프리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D50은 다른 머신들에 비해 상당히 작았고, 양 옆에 있는 연료탱크로 인해 상당히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대단한 드라이버라도 이 머신에 적응하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스카리는 이 시련을 이겨냈다. 시즌 내내 그랑프리를 지배하던 메르세데스의 판지오를 퀄리파잉에서 1초 이상의 차이로 폴 포지션을 따냈고 레이스 당일에도 초반 9랩까지 란치아의 머신은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클러치에 문제가 생겨 리타이어 하기 전 까진 말이다.



이런 모습에 당연히 1955년 시즌에는 아스카리가 판지오의 메르세데스에 호적수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스카리는 개막전이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에서 2번 그리드를 확보 한 뒤 레이스에서 선두를 따냈지만 서킷에 떨어진 오일을 밟으며 스핀하는 바람에 리타이어 한다. 그해 나폴리와 토리노에서 열린 논-챔피언십(F1 챔피언십 포인트에 계산되지 않는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챔피언십 그랑프리 였던 모나코에서는 앞뒤로 메르세데스 듀오인 판지오와 모스를 두고 레이스를 시작해야했고 둘이 리타이어 할 때 까지 그들의 꽁무니를 뒤쫓기에 바빴다. 메르세데스 듀오가 리타이어 한 뒤 그는 20랩이나 선두를 유지하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브레이킹 문제가 발생하면서 그는 항구 쪽 시케인에서 코스를 이탈하여 부둣가로 빠지고 만다. 충격으로 코를 다친 아스카리는 수영을 해서 뭍에 닿을 수 있었다.



4일 후 밀라노에 있는 자택에 있던 그는 후배인 유지니오 카스텔로티(Eugenio Castellotti)에게 주말에 몬자에서 열리는 스포츠카 레이스에서 페라리의 차량을 사용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카스텔로티는 당시 차량을 테스트 하고 있었고 아스카리에게 보고 싶다면 한번 올 수 있냐고 물어봤다. 물론 아스카리가 차를 운전하라는 의미는 아니였다. 하지만 점심식사 후 그는 몇 랩 정도를 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선택은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평소 아스카리가 미신처럼 믿고 있던 그의 행운의 상징인 파란 셔츠와 핼멧을 집에 두고 온 상태에서 차를 몰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평소에 입던 파란색 셔츠 대신 카스텔로티가 입던 하얀색 옷과 헬멧을 쓰고 차량에 올랐다.



세바퀴째 서킷을 돌고 있을때, 그는 좌회전 고속코너인 비알로네(Vialone) 코너에 충돌하고 만다. 충돌로 차에서 튕겨나간 아스카리는 중상을 당했고 얼마안가 사망하고 만다.




그가 평소에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파란옷과 헬멧




그의 사망은 아버지이자 또한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따낸 드라이버였던 안토니오 아스카리(Antonio Ascari)와 기묘한 우연으로 사람들에게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두 부자 모두 36살에 죽었고 아버지인 안토니오는 1935년 7월 6일 아들인 알베르토는 1955년 5월 26일날 사망했다. 모두 13번의 그랑프리를 우승하고 엔트리 번호 26번의 차량을 몰았다. 또한 둘 다 좌회전 코너에서 사고를 당했고 대형사고에서 살아 남은지 4일만에 사고로 숨졌다는 것 역시 똑같았다. 마지막으로 둘 다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아스카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고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의 사망은 의심할 것 없이 F1에 있어 큰 슬픔이었다.


판지오는 그의 죽음에 “제 최고의 라이벌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애도했다. 또한 아스카리가 사망한 다음해 판지오는 그에 대한 평가를 아래의 말로 표현했다.



“아스카리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드라이버 였습니다. 전 작년에 제가 따낸 챔피언 타이틀의 가치가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가 더 이상 저랑 경쟁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죠. 정말 위대한 드라이버 였죠”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8690210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질 빌르너브(Gilles Villeneuve)


국적 : 캐나다

그랑프리 참여 : 68회

월드챔피언 : 0회 (1979년 2위가 최고성적)

그랑프리 우승 : 6회

포디엄(시상대) : 13회

폴 포지션 : 2회

기타사항 : 1997년 챔피언 자크 빌르너브(Jaques Villeneuve)의 아버지

               캐나다 그랑프리가 열리는 서킷이 그의 이름을 딴 질 빌르너브 서킷




질 빌르너브는 4년간의 짧은 F1 커리어에서 단 6번의 그랑프리 우승밖에 해내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은 F1 그랑프리의 영웅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단 빌르너브의 이름이 아일톤 세나(Ayrton Senna), 짐 클락(Jim Clark) 후안 마누엘 판지오(Juan Manuel Fangio)등과 함께 이 리스트에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매우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정말 가히 세상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라고 할 정도로 타고난 드라이버이자 무모한 드라이버였다.



1979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이 왜소한 캐나다인은 바퀴가 떨어져나가 세 바퀴로 굴러가던 머신을 상상도 못할 속도로 몰아가며 피트에 들어와선 어떻게 해서든 리드를 지키고 있던 레이스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 모습이야말로 그의 무모함과 스피드를 모두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BBC F1의 해설자인 에디 조단(Eddie Jordan)은 “그는 한 번도 챔피언이 못된 훌리건같은 사람이었죠. 정말 차를 바보 같이 몰았어요”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아주 매력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만약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몇 번의 타이틀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1979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세바퀴로 달리는 빌르너브




의심의 여지없이 당시 빌르너브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혹사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커리어를 걸쳐 최고의 머신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전설적인 페라리의 디자이너인 마우로 포지에리(Mauro Forghieri)는 “분노의 승리”라고 표현했었다) 또한 그의 재능이 그가 모는 머신들의 성능까지 격하시켰던 이유도 있었다. 아마도 그 어느 드라이버라도 빌르너브가 직접 몰았던 머신의 성능을 그가 했던 만큼 끌어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페라리(Ferrari)에서 뛰지 않았던 그의 F1 데뷔부터 그의 특별했던 재능을 보여준 여러 그랑프리들을 보는 것은 상당히 값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77년 실버스톤(Silverstone)에서 열린 영국 그랑프리에서 그는 맥라렌의 구식 머신으로 신형 머신을 가지고 출전한 팀 메이트 요헨 마스(Jochen Mass)를 퀄리파잉에서 압도했다. 그러나 빠른 피트스탑으로 인해 그는 폴 포지션을 차지한 제임스 헌트(James Hunt)뿐만 아니라 팀 메이트에게 두 바퀴나 뒤처지게 되고 그 상태로 레이스를 마치고 만다.


1978년 몬자에서는 레이스 내내 선두를 놓고 자신 보다 빨랐던 머신인 로터스 79(Lotus 79)를 몰던 마리오 안드레티(Mario Andretti)와 함께 배틀을 벌였다.


1979년 남아공에서는 팀 메이트인 조디 셱터(Jody Scheckter)를 33랩동안 30초가량 차이를 벌리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있었던 미국 동부 그랑프리 연습세션은 폭우 속에서 시작했었다. 당시 셱터는 자신이 가장 빠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세션에 임했다. 그러나 그가 페라리의 차고로 들어온 순간, 그는 빌르너브가 자신보다 랩당 10초씩이나 빠르다는 것은 발견한다.

 

1980년의 모나코 그랑프리도 폭우속에서 열렸다. 당시 빌르너브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페라리의 머신과 슬릭 타이어(주: 맑은 날씨에 사용하는 홈이 파이지 않은 타이어)를 가지고 다른 드라이버보다 랩당 5초씩이나 빠른 모습을 보여줬다.




1980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의 빌르너브




물론 이것들 말고도 그의 경이로운 그랑프리 리스트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그에게 과분한 선물이라 할 수 있는 1981년 모나코와 스페인에서의 승리가 단연 최고라 할 것이다.



이 두 번의 그랑프리 우승은 평소에 빌르너브를 무모하고 둔감한 핸들링의 드라이버라는 편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당시 그의 드라이빙은 정말 섬세하고 정교했다.


1981년 페라리는 터보엔진을 채택하면서 타 팀보다 강력한 출력으로 우위를 확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엔진의 성능만큼 섀시가 따라주지 않았고 모양은 마치 농기계처럼 크기만 했다. 빌르너브는 섀시를 보고 “빨간색 큰 케딜락”이라고 말했고, 모나코의 좁은 시가지 서킷에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빌르너브가 브라밤(Brabham)팀의 넬슨 피케(Nelson Piquet)에 이어 2번 그리드를 확보했지만 당시 F1의 많은 관계자들에게는 머신을 가볍게 해서 달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한편 빌르너브의 새로운 팀 메이트였던 디디에 피로니(Didier Pironi)(아마도 당시에 세상에서 두 번째로 빠른 드라이버 였을 것이다)는 빌르너브에게 2.5초 뒤쳐져 16번 그리드를 배정 받는다.


레이스에서 빌르너브의 페라리 머신은 날렵한 브라밤의 머신 뿐만 아니라 앨런 존스(Alan Jones)의 윌리엄즈 머신까지도 따라잡기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브레이크를 관리하면서 페이스를 끌어 올렸고, 피케와 존스가 사고와 머신문제로 뒤처지자 그들을 추월해 우승을 차지한다.


2주 뒤 스페인의 구불불한 하라마(Jarama) 서킷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모나코만큼 이나 각인될만한 명승부를 펼친다. 당시 그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빈틈없는 드라이빙과 페라리 엔진의 강력한 출력으로 50랩 동안 4대의 차량을 가로막으며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브라밤의 머신 디자이너였던 고든 머레이(Gordon Murray)는 트랙옆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자신이 본 최고의 드라이빙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페라리시절 팀 메이트인 디디에 피로니(좌)와 빌르너브(우)




그러나 빌르너브의 추종자들이 칭송하는 그의 드라이빙뿐만 아니라 그는 공격적이 드라이빙 속에서도 공평한 경쟁을 하던 진정한 드라이버였다. 1982년 챔피언을 차지한 케케 로즈버그(Keke Rosberg)는 그를 두고 “진정으로 위대한 드라이버”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성품이 그의 죽음의 한 몫을 하기도 했다. 1982년 산 마리노 그랑프리에서 빌르너브는 팀 오더로 인해 1위로 달리던 피로니를 추월하지 못하고 우승을 빼앗기자 다시는 그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빌르너브는 2주가 지난뒤 열렸던 그리고 그의 마지막이 된 벨기에 그랑프리 때 까지도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퀄리파잉 세션에서 그는 느리게 지나가던 마치(March)팀의 요헨 마스의 차를 만났고 순간의 판단 실수로 충돌을 일으키고 만다. 빌르너브의 페라리 머신은 트랙 밖으로 튕겨나가면서 그 역시 머신 밖으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경추 손상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그를 추모하는 말들이 잇따랐다. 셱터는 “제가 그동안 본 드라이버 중 세상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 였습니다”고 했고,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는 “남은 우리 프로 드라이버들에게 귀감이 될 마지막 드라이버입니다”하며 그를 추모했다. 마지막으로 1981년 빌르너브와 하라마 서킷에서 경쟁했던 자크 라피테(Jacques Laffite)는 “어느 인간도 기적을 행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질은 기적을 보여줬죠”로 그를 평가했다.


그와 커리어를 함께 하면서 머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의 드라이빙에 큰 인상을 받은 라이벌들은 위의 말들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벨기에 그랑프리의 사고로 대파된 그의 페라리 머신. 이 사고로 그는 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드라이빙으로 그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그의 재능에 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동료 드라이버들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자주 목숨을 건 드라이빙은 결국 그 값을 치르고야 말았다.


Posted by 주봉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8492552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나이젤 만셀(Nigel Mansell)


국적 : 영국

그랑프리 참여 : 191회

월드챔피언 : 1회(1992년)

그랑프리 우승 : 31회

포디엄(시상대) : 59회

폴 포지션 : 32회

기타사항 : 8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을 대표하던 드라이버




나이젤 만셀은 F1 머신이라는 드라마속의 주인공이었다.



머신 속에서 보여준 그의 과감한 추월능력이나 그의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던 2인자라는 피해의식 같은 것에 상관없이, 이 콧수염난 중부출신의 드라이버 주변에는 지루하거나 따분할만한 일은 없었다. 그의 커리어에서 아일톤 세나(Ayrton Senna)와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는 때어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는 이 두 거인들을 상대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F1에 보여주었다.



그의 화끈한 드라이빙에 많은 사람들이(심지어 F1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어색함을 만들고 이래저래 팀에 요구를 많이 하는 그의 까다로운 성격이 그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 때가 많았다.



80년대의 F1을 수놓았던 거인들

(좌측부터 아일톤 세나, 알랭 프로스트, 나이젤 만셀, 넬슨 피케)




만셀의 커리에어 있어서 대부분의 성공은 2번에 걸쳐 윌리엄즈(Williams)팀에서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로 팀을 떠날 때 팀의 수장인 프랭크 윌리엄즈(Frank Williams)까지도 “나이젤은 자만심이 넘치고, 거만하죠. 그리고 교만하기까지 해요” 또한 “우린 그를 드라이버로서 그리워할 것이지 동료로선 기억하진 않을겁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세나와 프로스트가 F1의 영광을 미리 만들어놓은 운명이었던 반면, 만셀은 그를 의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그는 하위 포뮬러 시절부터 뛰어난 투지를 보여줬지만 항상 부족한 경제적 지원 속에서 레이스를 해야만 했다. 포뮬러 포드(Formula Ford 주: 포드 엔진 원 메이커로 이루어진 하위포뮬러)시절 목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을 때, 전신마비를 당하지 않은게 행운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스스로 병원을 뛰쳐나와 레이싱을 다시 했던 일화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히 F1에서도 그의 포기하지 않는 의지는 데뷔 초부터 나타났다.



1980년 로터스(Lotus)팀 소속으로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데뷔한 그는 누출된 연료가 조종석으로 세면서 발생한 화상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레이스를 펼쳤다. 그가 머신을 멈춘 순간은 기계문제로 인해 리타이어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만셀은 로터스팀의 수장인 콜린 채프먼(Colin Chapman)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1982년 12월 채프먼의 갑작스런 죽음은 팀에서의 그의 입지 확보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로터스 시절 콜린 채프먼(좌)와 만셀



 

채프먼의 자리에 올라온 피터 와르(Peter Warr)는 팀을 이끌면서 만셀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와르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만셀이 팀에 있을 당시, 그는 온 세상이 그의 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또한, “그의 거만한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했던 팀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던 행동이나 태도는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죠” 라고 말했다.



와르는 특히 만셀이 로터스 시절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의 실수를 가장 크게 비판했었다.



비속에서 열린 경기에서 만셀은 맥라렌의 알랭 프로스트에게 리드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는 언덕을 오르면서 충돌하고 만다. 그리고는 도로에 그어진 흰 선이 실수를 유발하게 했다고 불평했다. 또한 로터스 시절 만셀은 팀 메이트이자 이탈리아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거기에 성격도 만셀과는 딴판의) 엘리오 드 안젤리스(Elio de Angelis)에게 패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결국 로터스는 1985년에 세나를 영입하였고, 만셀은 윌리엄즈 팀에서 F1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갔다. 만셀의 이적은 그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

 

만셀을 영입한 윌리엄즈는 그가 팀의 퍼스트 드라이버이자 당시까지 만셀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보여주고 있던 케케 로즈버그(Keke Rosberg)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날 즘 그는 로즈버그보다 2번의 그랑프리 우승을 가져가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여기에는 당시 엔진 공급업체인 혼다의 도움도 있었다.)



1986년 윌리엄즈는 더블챔피언에 빛나던 팀 메이트 넬슨 피케(Nelson Piquet)를 영입하며 만셀이 또 그를 보조하길 바랐다. 그러나 만셀이 초반 좋은 모습을 보여주자 이 둘 사이의 챔피언을 향한 경쟁심이 불 붙기 시작한다.




윌리엄즈 시절 만셀(6번차량)과 피케




결국 이 둘의 관계는 불신과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여기에 윌리엄즈의 팀 오더까지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면 챔피언 타이틀을 프로스트에게 내주고 만다. 챔피언을 향한 만셀의 꿈은 시즌 마지막 대회에서 리어 타이어 펑쳐와 함께 날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윌리엄즈는 1987년 시즌내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면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고 만다.


87년 시즌에 피케는 3번의 우승을 차지했지만 만셀은 7번의 그랑프리를 우승했었다.(그 중에서도 역시 일품은 실버스톤(Silverstone)에서 벌인 피케와의 배틀일 것이다.) 그러나 그해 챔피언은 피케에게 돌아가고 마는데, 만셀이 실수와 머신의 신뢰성 등으로 리타이어 하면서 나온 결과였다.



다음해 터보엔진으로 무장한 맥라렌에게 자연흡기 엔진의 윌리엄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만셀은 1989년 페라리(Ferrari)로 이적하게 되고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는 F1에 반자동 기어박스가 첫 선을 보일 때였는데, 프리시즌 테스트 주행때 뿐만 아니라 시즌 개막전이 열리던 브라질에서의 연습주행에서도 최악의 신뢰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끔찍한 상황을 인식한 만셀은 완주를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빠른 비행기편을 예약하지만 비행기는 타지 못하고 만다. 왜냐하면 머신은 끝까지 잘 굴러갔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 할 것이라던 우승까지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이 모습에 페라리의 팬들인 티포시(tifosi 주: 페라리의 극성팬들을 일컫는 말)들에게 그의 투지를 ‘사자왕’(Il Leone)이라고 부르며 찬양하도록 만들게 한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12그리드에서 출발해 맥라렌의 세나를 제치고 우승하며 큰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1989년 브라질 그랑프리에서의 만셀




그러나 1990년 맥라렌에서 세나와의 갈등으로 이적한 프로스트가 페라리로 오면서 만셀과 페라리의 관계도 틀어지기 시작한다.


세나와 챔피언을 놓고 다투던 프로스트는 이적 첫 해 5번의 그랑프리 우승으로 만셀을 압도했고 이 결과에 만셀의 좌절감과 팀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 간다. 그리고 영국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머신이 부서지며 리타이어하자 그는 관중들에게 장갑을 집어던지며 은퇴를 발표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 은퇴하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실제로도 그는 윌리엄즈로 돌아오려고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결과를 생각한다면, 이 이적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1991년 윌리엄즈의 FW14는 가장 빠른 머신이었지만 만셀은 초반의 패배로 세나를 뒤따라 잡을 수 없었고 거기에 윌리엄즈의 반자동 기어박스의 문제도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다음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엑티스 서스펜션을 장착한 FW14B는 F1 역사에 길이 남는 명차였고 만셀은 시즌을 압도하며 9번의 우승과 14번의 폴 포지션을 차지하며 지난해에 챔피언을 차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던 사람들에게 타이틀을 선물해준다.

 



F1역사에 명차로 길이남는 FW14B와 만셀




비록 고액을 요구한 만셀도 만셀 다웠지만, 1993년 시즌을 위한 재계약이 결렬된 것은 참으로 하나의 드라마 같았다. 좀 어이없게도 협상을 방해한 가장 큰 요인은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팀이 그에게 제공해준 호텔방 수였다. 그러나 혹자는 그가 윌리엄즈에 계속 머물렀으면 프로스트와 다시 한 번 같은 팀에서 뛰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계약 결렬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이 어쨌든, 만셀은 F1에 등을 돌려 인디카(IndyCars 주: 미국의 대표적인 오픈 휠 타입 레이싱 카테고리)로 이적했고 데뷔 첫해에 압도적인 모습으로 챔피언에 오른다.



인디카에서 활약하던 시절 1978년 F1 챔피언 마리오 안드레티(좌)와 함께한 만셀




F1이 가장 치열한 스포츠였던 그 시절, 나이젤 만셀은 위대하고 화려했던 드라이버 중 한명으로 기억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기억될 것이다.


Posted by 주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