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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5 [BBC F1선정 최고의 드라이버 20인] 17. 에머슨 피티팔디(Emerson Fittipaldi)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7743265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에머슨 피티팔디(Emerson Fittipaldi)


국적 : 브라질

그랑프리 참여 : 149회

월드챔피언 : 2회(1972년, 1974년) 

그랑프리 우승 : 14회

포디엄(시상대) : 35회

폴 포지션 : 6회

기타사항 : 브라질인 최초의 F1 챔피언



에머슨 피티팔디는 여러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후배 브라질 드라이버들에게 길을 열어줌으로써 브라질을 F1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로 만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1972년 최연소 월드챔피언에 오른 기록을 30년 동안 가지고 있는 드라이버이기도 하다. (물론 훗날 이 기록은 페르난도 알론소(Fernando Alonso),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 세바스찬 베텔(Sebastian Vettel)에 의해 깨지고 만다) 피티팔디의 최연소 챔프 기록은 짐 클락(Jim Clark)이 1963년에 월드챔피언에 오를 당시(물론 클락의 이 업적에 대해 훗날 다시 설명할 것이지만) 나이보다 2년이나 단축한 것 이었다.



후배 드라이버인 아일톤 세나(Ayrton Senna), 루벤스 바리첼로(Rubens Barrichello)도 그랬던 것처럼, 피티팔디는 대부분의 브라질 드라이버들이 자랐던 상 파울루(Sao Paulo)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당시 브라질 드라이버가 유럽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쉬운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드에 빠져 살던 에머슨과 그의 형 윌슨은 1969년 유럽으로 떠난다.



 

1969년 F3에서 활약할 당시의 피티팔디


단 2년만에 영국의 하위 포뮬러들에서 우승을 거둔 그는 1970년 당시 챔피언 타이틀을 향해 도전하던 요헨 린트(Jochen Rindt)의 소속팀인 로터스 F1팀으로 데뷔하게 된다.

 

 

팀 메이트였던 린트가 몬자에서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피티팔디는 팀의 퍼스트 드라이버가 되지만, 데뷔 5경기 만에 생애 첫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 우승은 고인이 된 팀 메이트의 챔피언자리를 확정해주는 우승이기도 했다.


 

1971년 프랑스에서 아내와 함께 당한 교통사고로 부진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바로 다음해인 1972년, 피티팔디는 검은색과 금색의 조화가 인상적인 머신 로터스 72와 함께 시즌을 완벽하게 지배한다. 피티팔디는 시즌 11번의 그랑프리에서 5번의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피티팔디의 친구이자 항상 그가 대단하다고 말하길 마다하지 않는 티렐(Tyrrell)의 제키 스튜어트(Jackie Stewart)를 꺾으며 우승한 영국 그랑프리도 있었다.

 



2010년 바레인 그랑프리에서 로터스 72를 직접 운전한 피티팔디




당시 피티팔디는 최고의 차를 가진 최고의 드라이버였다. 정말이지 시즌 내내 실수란 없었으니 말이다.


 

첫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피티팔디는 예전처럼 강한 경쟁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교활하면서도 영특한 재치로 우승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는 그가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고 일년 뒤, 팀 메이트와의 모종의 관계 때문에 그럴 것이다.



1973년 시즌에 피티팔디의 팀 메이트로 변덕스런 성격의 로니 페터슨(Ronnie Peterson)이 들어오는데, 피티팔디는 이 결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페터슨은 F1에서 ‘가장 빠르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드라이버였는데, 만인의 예상대로 그는 퀄리파잉에서 그의 팀 메이트인 피티팔디를 압도했다. 그러나 피티팔디의 정교한 드라이빙은 그가 올-라운드 타입의 위대한 드라이버임을 증명했을 뿐 아니라 페터슨보다 레이스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몇 가지 면에서 피티팔디와 페터슨의 관계는 훗날 맥라렌의 세나-프로스트의 관계와 매우 비슷했다. 피티팔디는 프로스트처럼 머신 셋업에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인 반면, 패터슨은 세나처럼 머신을 정말 빠르게 몰줄 아는 드라이버였기 때문이다. 또한 프로스트처럼 피티팔디는 안전한 드라이빙을 좋아했다. - 그러나 프로스트와는 다르게 피티팔디는 안전을 추구하면서 빠른 드라이빙을 선보였다.


 


피티팔디(우)와 그의 팀 메이트이자 '슈퍼 스웨드'라 불리던 로니 페터슨(좌)



 

어쨌든 피티팔디와 페터슨의 이런 관계는 단 1년이면 족했다. 1973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피티팔디는 맥라렌(McLaren)으로 팀을 옮겼고, 다음해 바로 생애 두 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간다. 그의 우승은 그야말로 ‘완승’이었는데, 3번의 우승과 4번의 포디엄 피니시는 부활의 신호를 알리던 페라리의 클레이 레가조니(Clay Regazzoni)를 꺾는데 충분한 포인트였다.



이 챔피언 타이틀로서 피티팔디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F1의 인물로 우뚝 서게 된다. 그의 긴 머리와 선글라스 그리고 특유의 여우같은 인상과 특유의 털 코트는 말 그대로 그 시기의 슈퍼스타의 이미지를 만들어줬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의 그의 업적을 모두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피티팔디는 맥라렌에서 한 시즌을 더 머물었지만, 니키 라우다(Niki Lauda)가 페라리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할 동안 두 번의 우승밖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F1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바꿔 자신의 팀을 세워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팀을 만들겠다는 결정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형인 윌슨과의 의리 그리고 훗날 팀의 머신 디자이너가 되는 친구 히카르도 디빌라(Ricardo Divila)와의 우정 때문이었다.

 



1974년 영국 그랑프리에서의 피티팔디



 

피티팔디 팀은 브라질 기업의 후원을 받는 확실한 브라질 내셔널 팀이었지만, 모터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는 드라이버인 에머슨에겐 이 팀은 그동안의 자신의 커리어를 모두 날려버리는 재앙과 같은 팀이었다. 피티팔디는 5년간 팀에서 변변치 않은 포인트를 올렸는데 그나마 가장 나은 시즌이었던 1978년 조국에서 열린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2위를 기록한게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리고 1980년 시즌을 끝으로 팀에서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한 그는 33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하고 팀이 해체되는 1982년까지 팀의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은퇴할 당시에는 그의 재능이 살아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클래스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또 한번 보여준다. 1984년 피티팔디는 미국에서 인디카(IndyCar)로 새로운 모터스포츠 커리어를 시작했고 1989년에는 챔피언 타이틀을 그리고 89년과 93년에는 인디 500레이스(Indy 500)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1993년 인디 500레이스에서 우승한 피티팔디



 

그가 쌓은 업적을 보고 있자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생긴다.

‘만약 애국심이 그의 야망을 넘보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말이다



Posted by 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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