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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23 [BBC F1선정 최고의 드라이버 20인] 11. 알베르토 아스카리(Alberto Ascari)

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8826717

※ 몇몇 사진은 실제 BBC기사에는 없는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알베르토 아스카리(Alberto Ascari)

국적 : 이탈리아

그랑프리 참여 :33회

월드챔피언 : 2회 (1952년, 1953년)

그랑프리 우승 : 13회

포디엄(시상대) : 17회

폴 포지션 : 14회

기타사항 : F1 최초의 더블챔피언

               한 시즌에 참가한 그랑프리를 모두 우승한 유일한 챔피언



알베르토 아스카리는 현재의 F1 드라이버들과는 좀 많이 다른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의 두툼한 볼살과 통통한 몸매는 지금의 운동선수들의 마른 이미지보단 밀라노의 빵집 주인아저씨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대에 그랑프리를 재패하던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F1 드라이버들을 모호한 기준으로 특히 단순한 기록으로만 평가하려는 것은 아스카리의 진가를 확인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겐 절대로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위대한 업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1948년 아직 F1으로 재편되기 전의 영국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아스카리(좌)




1952년 벨기에 그랑프리부터 그 다음해 열린 같은 대회까지 아스카리는 모든 F1 그랑프리를 우승했다.



1952년에 그의 첫 번째 우승타이틀을 페라리 소속으로 따낼 때 그는 참가했던 모든 그랑프리를 우승하며 타이틀을 획득한다. 1953년 챔피언에 또 다시 오를 때까지 그는 13번의 그랑프리에서 11번이나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1955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커리어가 끝나지만 F1이 시작한 1950년부터 5년간 특히 51년부터 53년까지 3년 동안 그는 32번의 레이스에서 13번 우승을 했다. 이 40%를 넘는 승률은 오로지 후안 마누엘 판지오(Juan Manuel Fangio)만 넘었다.



이런 말만 들으면 당시의 그의 상대가 없었던 것처럼 들린다. 물론 1952년 시즌 페라리는 시즌을 지배했던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팀 메이트는 판지오를 꺾고 초대 F1 챔피언에 올랐고 판지오와 함께 알파 로메오(Alfa Romeo) 소속으로 뛰었던 주세페 파리나(Giuseppe Farina)였다.



1952년 시즌에 판지오가 부상으로 시즌을 날려버리긴 했지만 다음해 마세라티(Maserati) 소속으로 돌아왔고 또한 그 해에는 1951년 페라리에게 첫 실버스톤(Silverstone) 서킷에서의 승리를 선사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세 플로리안 곤살레스(Jose Frolian Gonzalez)도 있었다. 그리고 아스카리의 페라리 팀 메이트는 최초의 영국인 월드챔피언 마이크 호손(Mike Hawthorn)이었다.



사실 아스카리의 진면목을 알아본 사람은 팀 메이트인 호손이었다. 1958년 스털링 모스(Stirling Moss)를 간신히 꺾으며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이 영국인 드라이버는 아스카리에 대해 “판지오와 더불어 아스카리는 정말 제가 본 드라이버 중 최고에요”라고 평가했다. 그의 결과가 말해주듯, 아스카리는 무자비한 우승기계였다. 또한 그는 레이싱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달리는 침착한 드라이버였다.



 

초창기 F1을 수놓았던 인물들 왼쪽부터 주세페 파리나, 알베르토 아스카리, 마이크 호손, 루이지 비로레시



 

그의 푸른 옷과 헬멧은 페라리의 빨간 머신의 색과 함께 1950년대 F1을 대표하던 상징이었다. 그는 살짝 구부려 앉아서는 다른 드라이버들보다 달리 팔을 더 구부려 핸들을 상당히 가까이 잡은 체 운전을 했다.



그에 대해 엔초 페라리는(주: 페라리의 설립자) “아스카리는 정교하고 뛰어나 드라이빙을 보여 줬죠” 또한 “그는 항상 레이스 시작부터 선두를 지켰어요. 일단 선두에 서면 그 어느 누구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알베르토는 선두에 서면 안심하는 성격이었죠. 그때가 가장 그의 스타일이 빛나는 순간이었죠. 2위로 떨어지거나 더 아래로 내려가면 그는 불안해 했죠”라고 말했다



1952년과 1953년 사이, 아스카리는 그랑프리에서 선두를 거의 뺏기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 몬자(Monza)에서와 같이 뒤처지는 일이 있기도 했다. 이미 챔피언을 확정지은 상태에서 시즌 마지막 경기에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그는 팀 메이트인 파리나와 마세라티의 판지오 그리고 오노프레 마리몽(Onofre Marimon)과 경쟁해야 했다. 서킷의 마지막 코너인 파라볼리카(Parabolica)를 선두로 지나고 있던 그는 두 명의 백마커(선두보다 한 바퀴 이상 뒤쳐진 차량)를 지나고 난 뒤 뒷바퀴의 압력으로 미끄러지고 만다. 그리고 게임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당시에 그는 몰랐겠지만 이후로 아스카리는 그랑프리에서 단 1점의 포인트도 따지 못하게 된다.



 

빨간색 머신과 파란 옷 그리고 헬멧은 그만의 상징이었다.

(란치아 소속이던 1955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경제적인 이유가 컸지만, 1953년 시즌이 끝날 즈음 그는 페라리를 떠나 란치아(Lancia) 팀으로의 이적을 발표한다. 당시 란치아는 혁신적인 머신인 D50의 드라이버로 아스카리를 선택한 것이었다.



비록 아스카리가 밀레 밀리아(Mille Miglia) 도로 레이스(주: 1927년부터 1957년까지 열린 이탈리아의 내구레이스 대회)에서 악천후를 뚫고 승리를 차지했지만 1954년 시즌은 란치아의 프로젝트 연기로 날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해 시즌 막판 페라리는 그가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불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머신을 빌려줬지만 메르세데스(Mercedes)의 판지오에게 밀리며 엔진 블로우로 리타이어하고 만다. 란치아의 D50은 바르셀로나 페드랄베스(Pedralbes) 서킷에서 열린 시즌 마지막 대회였던 스페인 그랑프리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D50은 다른 머신들에 비해 상당히 작았고, 양 옆에 있는 연료탱크로 인해 상당히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대단한 드라이버라도 이 머신에 적응하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스카리는 이 시련을 이겨냈다. 시즌 내내 그랑프리를 지배하던 메르세데스의 판지오를 퀄리파잉에서 1초 이상의 차이로 폴 포지션을 따냈고 레이스 당일에도 초반 9랩까지 란치아의 머신은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클러치에 문제가 생겨 리타이어 하기 전 까진 말이다.



이런 모습에 당연히 1955년 시즌에는 아스카리가 판지오의 메르세데스에 호적수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스카리는 개막전이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에서 2번 그리드를 확보 한 뒤 레이스에서 선두를 따냈지만 서킷에 떨어진 오일을 밟으며 스핀하는 바람에 리타이어 한다. 그해 나폴리와 토리노에서 열린 논-챔피언십(F1 챔피언십 포인트에 계산되지 않는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챔피언십 그랑프리 였던 모나코에서는 앞뒤로 메르세데스 듀오인 판지오와 모스를 두고 레이스를 시작해야했고 둘이 리타이어 할 때 까지 그들의 꽁무니를 뒤쫓기에 바빴다. 메르세데스 듀오가 리타이어 한 뒤 그는 20랩이나 선두를 유지하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브레이킹 문제가 발생하면서 그는 항구 쪽 시케인에서 코스를 이탈하여 부둣가로 빠지고 만다. 충격으로 코를 다친 아스카리는 수영을 해서 뭍에 닿을 수 있었다.



4일 후 밀라노에 있는 자택에 있던 그는 후배인 유지니오 카스텔로티(Eugenio Castellotti)에게 주말에 몬자에서 열리는 스포츠카 레이스에서 페라리의 차량을 사용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카스텔로티는 당시 차량을 테스트 하고 있었고 아스카리에게 보고 싶다면 한번 올 수 있냐고 물어봤다. 물론 아스카리가 차를 운전하라는 의미는 아니였다. 하지만 점심식사 후 그는 몇 랩 정도를 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선택은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평소 아스카리가 미신처럼 믿고 있던 그의 행운의 상징인 파란 셔츠와 핼멧을 집에 두고 온 상태에서 차를 몰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평소에 입던 파란색 셔츠 대신 카스텔로티가 입던 하얀색 옷과 헬멧을 쓰고 차량에 올랐다.



세바퀴째 서킷을 돌고 있을때, 그는 좌회전 고속코너인 비알로네(Vialone) 코너에 충돌하고 만다. 충돌로 차에서 튕겨나간 아스카리는 중상을 당했고 얼마안가 사망하고 만다.




그가 평소에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파란옷과 헬멧




그의 사망은 아버지이자 또한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따낸 드라이버였던 안토니오 아스카리(Antonio Ascari)와 기묘한 우연으로 사람들에게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두 부자 모두 36살에 죽었고 아버지인 안토니오는 1935년 7월 6일 아들인 알베르토는 1955년 5월 26일날 사망했다. 모두 13번의 그랑프리를 우승하고 엔트리 번호 26번의 차량을 몰았다. 또한 둘 다 좌회전 코너에서 사고를 당했고 대형사고에서 살아 남은지 4일만에 사고로 숨졌다는 것 역시 똑같았다. 마지막으로 둘 다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아스카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고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의 사망은 의심할 것 없이 F1에 있어 큰 슬픔이었다.


판지오는 그의 죽음에 “제 최고의 라이벌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애도했다. 또한 아스카리가 사망한 다음해 판지오는 그에 대한 평가를 아래의 말로 표현했다.



“아스카리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드라이버 였습니다. 전 작년에 제가 따낸 챔피언 타이틀의 가치가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가 더 이상 저랑 경쟁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죠. 정말 위대한 드라이버 였죠”

Posted by 주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