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원문 기사 : http://www.bbc.co.uk/sport/0/formula1/17319968



F1의 역사를 통틀어 많은 드라이버들이 그들의 능력과 카리스마로 한계를 초월하는 모습들을 보여 왔다. BBC F1 선정 위대한 드라이버 20인에서 20위를 차지한 요헨 린트(Jochen Rindt) 역시 그런 드라이버 중 한명일 것이다.

 


 요헨 린트(Jochen Rindt)


 국적 :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참여 : 62회

 월드챔피언 : 1회(1970년)

 그랑프리 우승 : 6회

 포디엄(시상대) : 13회

 폴 포지션 : 10회


오스트리아 출신의 뺑코 드라이버는 현재까지 유일한 F1의 사후(死後) 챔피언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970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연습 세션도중에 사고로 사망한 후 그의 수많은 라이벌들이 그의 포인트를 따라잡는데 실패하기까지 그는 챔피언 타이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사후 챔피언이라는 사실보다 더 뛰어난 드라이버인 이유는 그가 모터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고 불꽃 튀는 삶을 살았던 드라이버 중 한명이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인 특유의 성격이 묻어나는, 또한 같은나라 출신의 후배 니키 라우다와는 다른 그의 퉁명함은 때때로 그를 거만하다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핀란드 출신의 모델이었던 그의 아내처럼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재미있고 상냥하며 친절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린트는 지금까지도 가장 공격적이고 와일드한 드라이빙을 가진 드라이버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후 10년 후에 나타나는 질 빌르너브와는 달리 그의 드라이빙 스타일은 그의 커리어의 대부분을 짜증만 났던 낮은 경쟁력의 머신들로 보내게 해야 했다. 그러나 그도 빌르너브처럼 가장 깔끔한 드라이빙 스타일의 드라이버 중 한명이었다. 특히 그가 좋은 머신에 올라타기라도 하면 드라이빙 스타일은 매우 부드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9년 비가오던 실버스톤에서의 인터내셔널 트로피 경주처럼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는 드라이빙 실력이었다. 린트는 당시 엔진문제로 뒤쳐진 상황에서 추월을 시작하였다. 한 바퀴를 돌아 스토(Stowe)코너로 진입할 때 린트는 피어스 커리지(Piers Courage)와 제키 익스(Jacky Ickx)를 뒤쫓고 있었다. 린트가 뒤쫓는 그들 앞에는 페드로 로드리게스(Pedro Rodriguez)와 그레이엄 힐(Graham Hill)이 있었다. 이 다섯 명이 코너에 진입할 때 까지만 해도 린트는 가장 뒤져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코너를 통과한 후에 선두는 린트였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이었다.

 

 

같은 해, 역시 실버스톤에서 열린 영국 그랑프리 역시 또 다른 하이라이트였다. 린트와 제키 스튜어트(Jackie Stewart)가 이 위대한 레이스의 주인공들이었다. 매 랩마다 순위가 바뀌는 그들의 대결에중에도 둘은 기록을 새로 경신하며 달렸고, 린트의 로터스(Lotus) 차량이 브레이크 문제로 뒤쳐질 때 까지 이 대결을 지속되었다


 

“정말 환상적인 대결이었죠, 때때로 우린 베켓(Becketts)코너나 다른 곳에서 서로 맞붙기도 했죠. 그러나 우리 모두 길을 내줘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물론 공간을 내줄 생각도 없었고요. 그리고 코너를 지날 때마다 우린 서로 쳐다보곤 했지요” - 제키 스튜어트



동시대 사람들 중에 린트가 당시에 가장 빠른 드라이버였다는 사실에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 한명정도는 1968년에 사망한 짐 클락(Jim Clark)을 생각하겠지만....

 

 

1965년 독일 그랑프리에서의 린트



1965년 쿠퍼(Cooper)에서 데뷔한 이후로 뒤떨어지고 신뢰성이 낮은 머신을 몰면서 린트는 첫 우승까지 4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는 그가 포뮬러 2에서도 뛰고 있던(F1 드라이버들이 하위 포뮬러에서도 경주를 했던 그 시절) 스튜어트, 클락, 힐처럼 그의 명성을 돋보이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린트의 커리어는 1969년 로터스팀에 합류하면서 바뀌게 된다. 위닝카를 원했던 것이 그가 이적을 한 이유였지만 팀의 보스인 콜린 채프먼(Colin Chapman)의 의중과 진심을 믿을 수 없었기에 이적 자체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물론 채프먼의 머신 스피드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피드에 집중된 세팅으로 부품들은 쉽게 닳았고, 그 결과로 상대적으로 브레이킹을 자주 할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는 호켄하임(Hockenheim)에서의 포뮬러 2 레이스 사고로 사망한 짐 클락을 대신하여 팀에 합류한 뒤 클락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매꾸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채프먼은 클락생전에는 클락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린트와는 항상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해 바르셀로나 몬주익(Montjuic)서킷에서 열린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린트의 머신에서 발생한 리어 윙 사고는 린트와 채프먼, 이 둘의 냉랭한 관계가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린트의 머신은 뒤집어진 다음에 팀 동료인 그레이엄 힐의 머신과 부딪혔다. 다행히 큰 부상은 피했지만, 이전에도 사고를 당한 곳에서 똑 같은 사고를 당한채로 리타이어 해야만 했다.



1970년 영국그랑프리에서 우승한 린트



1970년이 되어서도 린트는 채프먼이 제작한 새 머신 Lotus 72를 불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 모나코에서 잭 브라밤(Jack Brabham)을 마지막 랩까지 추격하며 그에게 시즌 첫 우승을 선사해준 머신은 구형 이었던 Lotus 49C 머신이었다. 이런 결과에도 결국엔 린트는 Lotus 72를 탈 수 밖에 없었지만, 이 머신으로 린트는 4번의 그랑프리 우승을 달성한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위해 몬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월드챔피언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시 린트와 채프먼 사이의 문제가 발생한다. 현재 레이아웃과는 달리 시케인이 없는 몬자의 특성상 린트는 Lotus 49가 더 적합한 머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개러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세 대의 Lotus 72가 있었고, 채프먼은 72를 몰라고 그에게 말했다. 뿐만 아니라 채프먼이 머신의 윙을 직선 속도위주의 세팅으로 변경하기위해 제거 할 때도 그 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윙을 제거한 세팅은 팀의 세 번째 드라이버인 존 마일즈(John Miles)가 무서워할 정도로 차량운전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세팅이었다.



결국 토요일 연습세션에서 린트의 머신은 몬자에서 가장 빠른 코너엔 파라볼리카(Parabolica)를 지날 때 머신이 틀어지면서 방호벽과 충돌하고야 만다. 사고의 원인은 리어 서스펜션의 결함으로 보였다. 사타구니 쪽에 안전벨트를 차고 있지 않았던 린트는 운전석으로 딸려 들어간 채, 안전벨트의 버클에 경추를 맞고 사망하고 만다.



그의 사후, 린트가 시즌이 종료된 후에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러나 인디펜던트지 F1 기자이자 린트의 전기를 집필했던 데이비드 트리메인(David Tremayne)은 린트가 매니저인 버니 에클스턴(Bernie Ecclestone)과 함께 팀을 자신의 팀을 만들기 전까지 1년 정도 로터스에서 더 뛰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정말 최고의 드라이버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제키 스튜어트나 짐 클락은 이 순위에서 더 높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린트가 당시에 그들과 같은 환경에서 경쟁했다면 그들을 이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셋 중의 현재까지 유일한 생존자인 제키 스튜어트는 여전히 그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게 아마 린트에 대한 최고의 평가일 테니까.

Posted by 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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